꽃이 너무 아름다워 내 것으로 소유하고픈 욕망에서 생각없이 꽃가지를 꺾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모두가 공유해야 할 아름다움을 훼손했기에 당연한 꾸지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 것이 오십고개를 넘어서이니 참 도덕심이 무딘 내 인생이었음을 나는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는 것은 자연과 동화(同化) 된다는 뜻인데 이 때 동화란 공유의 개념이지 소유의 개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치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예술행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술 행위를 내 소유개념으로 절대화 시킨다면 그 결과는 언제나 제로선상에 머물게 되고 만다 (소유가 아닌 공유라는 말은 언뜻 듣기에는 유물론적인 인상이 풍길지 모르지만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순수한 예술적 정서와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꼭 필요한 단어이다).
나는 대전연극협회라는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대전연극제를 끝내고 그 과정과 결과를 운운하는 몇몇 연극인들과 언론인들에게 꼭 되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당신들은 지금 연극을 사랑하십니까?” 라는 질문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식사랑은 의무인 동시에 그건 본능일 것이다. 내 자식 못났다고 자식 탓하는 부모도 없을 것이고 내 자식 무능하다고 무관심하는 부모 또한 없을 것이다.
내가 관계하는 예술행위에 진정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다소간에 못나고 무능력하더라도 보듬고 등 두드려주면서 한마디 위로를 해주는 것이 더 나은 자세가 아닐까? 분명 연극활동도 모두가 공유해야 할 문화일진데 내 언어적 소유개념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굳이 가지를 꺾어 상처를 내야 옳았단말인가?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못난 내 자식의 재롱은 예쁜 짓으로 보이지만 미움의 시선은 아기재롱이 역겨워지는 법이다.
함께 가꾸어 꽃을 피워야 할 연극꽃밭을 내가 관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가지꺾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꽃나무는 시들어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할말이 많고 속상하다. 하지만 못난 자식이 부모의 무관심에 항거한들 그 또한 못난 일이기에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또 1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나쁘면 기말고사와 2학기 성적을 올리면 되는 것이지 뭐 달리 할말이 있겠는가. 그런 심정으로 자구책을 강구해야 되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왜 그런 섭섭한 말을 들어야 했는지 자성하자! 자성하자! 하면서도 자꾸 머릿속에 의문이 맴돈다.
연극은 분명 공유이지 소유가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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