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유희화 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 보자. 인간의 기본 욕구 중의 하나가 먹는 행위이다. 일상에서 수 없이 반복되는 이 행위가 연극 무대에서 표현되면 그것은 일상이 아니다. 유희가 된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식욕 이상의 다른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더 격한 예를 들어 보자. 80년대 광주 항쟁 이후 대학가에서 시위 무기화 되었던 화염병은 심히 위험스러운 반독재 이념의 상징이었다. 이 화염병이 개그 콘서트에 나타나면 이념은 빠지고 유희만 남는다. 국회 의사당의 탄핵 난투극은 일상이지만, 그것이 세종로로 옮겨가면 촛불집회라는 유희로 바뀐다.
이것은 종교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행은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었지만 바하의 수난곡 안에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유희화 된다. 유희는 미적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유희화는 의미가 있고 좋은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인간 심성의 측면에서 볼 때도 당연한 것이다.
4월 둘째 일요일이 기독교계에 있어서 부활절 주일이다. 이제 전래 150년이 넘은 기독교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영역이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이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신자들만의 축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때마다 수많은 예술 공간과 교회에서 기독교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 기독교 이념이 일상 안에서 왕성하게 유희화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1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기독교 신도라니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흐름이 제한적인 종교 영역을 벗어나 열린 문화 공간으로 파급되는 것은 크게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유희화는 본질을 연성화하고 데카당스화 하는 경향도 갖는다. 서구 기독교가 보여주는 세속화가 그것이었다. 진정한 신앙은 사라지고 신앙의 권위만 남아 교황의 독재와 부패가 빚어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있게 했던 것. 대형교회의 물신숭배와 그 교회 목사들의 천박한 권위주의 행태가 드물지 않게 문제되는 요즈음이다.
세계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교회의 어떤 목사는 맹목적인 열광주의를 조장하며 한편으로는 자식에게 교회 재산을 대물림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고, 또 최근에는 정당을 만들고 나서기도 한다. 소박한 기독교 신자인 필자로선 가끔 두려운 눈으로 교회를 쳐다본다. 봄의 공기로 스며드는 아름다운 교회 음악을 들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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