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이란 단어를 직역해보면 ‘마음이 없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는 풀이가 곧바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아마도 물은 인간처럼 무엇을 갖고자 하고 한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慾心)’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다. 우리 선인들의 물에 대한 깨달음도 이와같지 않았을까.
필자는 수공인으로서 30여년동안 물과 함께 살아왔다. 그런 까닭에선지 물에 대한 정감이 나에게 살갑게 다가온다.
현근무처로 옮겨오면서 필자의 사무실에서 내려다보거나 댐위에 난 공도교를 거닐다 바라보이는 용담호의 잔물결은 나에게 삶의 철학을 선사하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준다.
물을 보고 있노라면 간혹 상념에 잠긴다.
그럴 때마다 ‘물에는 의식이 있다’는 일본인 ‘에모토 마사루’의 음성이 뇌리를 파고 든다. ‘에모토’는 최근 물과 관련된 책을 펴냈다. 세계사람들의 큰 반향을 일으킨 그는 물에 대한 기존관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토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에모토’의 정의처럼 물에는 의식이 있는 것일까. 또한 물에겐 ‘사랑’ 그 자체가 본성일까.
물은 모든 것을 포옹한다. 호불호를 따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푸른 하늘을 담아내고 어떤 때는 초록의 산림을 받아들이고 어떤 때는 불타는 석양을 껴안아 준다.
사람들은 괴롭거나 슬플 때는 곧잘 물을 찾는다. 아무리 노년의 나이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물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물을 바라보면 어느덧 괴로움은 가셔지고 슬픔은 몸밖으로 빠져나가 후련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물의 본성이 순결함 그 자체이기에 물앞에 서면 자연스레 정화가 되는가 보다. 어린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어찌나 맑은 지 감탄하게 되는 이치다.
물은 본디 인간에게는 원초적 고향임에 틀림없다.
또한 물은 치열한 삶 자체를 거부한다. 서두르지 않는다.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 막히면 돌아가고 가득 차야 넘어간다. 위로 위로 치솟으려는 인간군상들의 심성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또한편 물은 아낌없이 주려고 한다. 반면 자신은 뭘 갖고자하는 법이 없다.
소유욕 자체가 번뇌와 불행의 근원임을 물은 일찌감치 알고 있는 건가. 물은 다양한 사람들이 정감을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필자가 현재 몸담고 있는 용담댐만 하더라도 하나의 반증이 된다. 용담댐은 전북과 충남의 경계에 서있다.
도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용담호를 보러왔다가 정겨운 눈길을 교환하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말을 건네고 서로의 따스한 손바닥을 맞잡도록 하는 마당을 제공한다.
특히 오랫동안 절대적인 물부족으로 식수난을 겪었던 전주를 비롯, 전북일원의 지역민들은 용담호의 존재가치를 절실히 깨닫고 충남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감사의 표현을 한다.
더욱이 절대적인 유수량부족으로 가뭄때나 갈수기인 겨울철에는 오염이 심각했던 만경강이 깨끗해지고 있으니 전북민의 진실함이 헤아려진다.
또한 용담댐이 웅자를 드러낸 이래 용담호수를 둘러보는 충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용담호를 찾았다가 산아래 펼쳐지는 운일암 반일암등의 명승지, 완주로 이어지는 협곡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변만화의 자연속으로 빨려 들고 있는 것이다.
물이란 자연을, 사람을 한 몸이 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또한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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