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시인이 이 시 ‘저녁눈’을 발표하던 때 나는 시인의 이웃동네에 사는 초등학생 아이였다. 물론 그때는 시인의 존재도, 또 ‘저녁눈’과 같은 작품도 당연히 모르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반으로 조용하고 예쁘장하고 그림 잘 그리던 어느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시인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때 박용래 시인이 살던 오류동에는 실제로 말집이 하나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되었지만, 그 당시 방적공장의 담을 따라 서대전역 쪽으로 가다보면 골목께로 터져 있는 허름한 어느 집 한 구석에 마구간이 있었다. 저녁 무렵에 그곳을 지나다 보면 말이 선 채로 여물을 먹거나 푸드덕거리며 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박용래 시인이 바로 그 말집을 보고 그 시를 써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시 고인이 된 이문구 선생이 약전을 쓰면서 박 시인의 집이 있던 오류동 17번지의 15호 가까이에는 주막이 하나 있고 짐꾼들의 “나귀랑 노새랑 황소랑 하품 섞인 투레질이 그치지 않던 곳”이었다고 지적을 해놓고 있으니 말이다.
듣고는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백색의 계엄령’이 발령되어 있었다.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2년에 최승호 시인은 이 시 ‘대설주의보’를 발표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계엄령’은 폭압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정치현실을 우의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대설주의보와 함께 들이닥친 이번의 폭설 또한 ‘백색의 계엄령’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24시간이 넘도록 고속도로에 갇혀 있었다는 풍문과도 같은 사실 하나로도 비상사태를 연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눈 속에 처박혀 있는 승용차들, 눈 위로 길게 이어지는 걷는 자들의 행렬, 비상사이렌을 울리며 바삐 오가는 제설차량들, 그리고 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삽과 제설도구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100년 만에 내렸다는 폭설 그대로 100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광경들이었다. 이 어찌 비상사태가 아니겠는가.
이제 ‘백색의 계엄령’은 풀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 내내 창문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만 보고 있었으니, 문득 그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기막힌 설경을 놓칠세라 산으로 달아날 생각부터 하고 있었으니 그 또한 부끄러워진다. 이웃 아파트보다 더 두껍고 더 땅땅한 저 주차장의 얼음 덩어리가 나를 또 부끄럽게 만든다.
그리하여 다시 박용래 시인을 생각했다. 그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하루 온종일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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