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충직한 정령은 아닌 것 같다. 달력을 보니 납세자의 날이건만 정작 오늘 3월 3일은 삼겹살데이란다. 소주를 마셔도 조국을 위하고 닭다리 하나, 삼겹살 한 점 먹더라도 애국심으로 양념하는 이 지독한 내쇼널리즘!
잔잔한 것이 오래가는데, 어쩔 땐 좀 호들갑스럽기까지 하다. 고구려를 소재로 한 우표? 전에도 나왔었다. 남북 공동우표 발행을 검토하게 한 것은 순전히 유관순처럼 어리고 여린 학생의 아이디어라 치고, 이걸 보자. 광개토왕의 영토확장, 여수장우중문시, 무용총 수렵도, 살수대첩 등 고구려 우표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애국심은 흐르고 흘러 유관순 줄넘기라는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줄넘기를 31번 넘는데, 넘을 때마다 유관순 캐릭터의 양손엔 태극기가 팔랑팔랑 펼쳐진다. 검색창에 ‘유관순 줄넘기’를 치면 나온다. 또 품에서 태극기를 끄집어내 만세 부르던 으능정이의, 국학원의, 철당간 앞의 플래시몹이라는 거사 재현도 끝났고 그 물결만이 도도하다.
이러한 물결에 기대 친일규명법,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을 만들었다면 진통이 덜하고 쉬웠을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 스스로 도처에서 자행하는 왜곡이 더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 불문곡직하고 유관순 영정을 그릴 화가가 일제를 위해 붓을 잡아 친일미술인 50인 리스트에 올랐다면 그가 영정 그림에서 천하의 달인이라 해도 말할 가치조차 없다.
혹여 유관순 혼자 빨래를 했다는 전기의 미화는 잘못된 허구라고 지적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천안대 김기창 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이화학당에서는 공동 세탁을 했다고 알려줘도 민족정기 어쩌며 귓등으로 흘려버린다고 한다. 그래도 이건 약과다. 애국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라 이번 삼일절에 보수단체는 서울시청 앞에, 진보단체는 탑골공원에 모였다. 우익은 서울운동장, 좌익은 남산공원 하던 그 옛날과 다를 게 없다. 서로가 보기에 진보의 열린 민족주의가 미지근하고 보수의 닫힌 민족주의가 못 미덥다.
우리가 흔히 진보와 보수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로 매일반이라지만, 엄밀히 따져 오십 보나 차이가 난다. 가령 창씨를 해도 김본(金本), 이가(李家), 장전(張田), 오산(吳山)으로 흔적만은 남기려는 이들이 있었다. 한데 창씨개명을 맨 앞에서 주도한 이들이 빠졌다면 이런 친일규명법은 필요 없다. 독립군 장군의 손녀 김희선 의원, 그리고 김원웅 의원 쪽의 민족정기모임 의원들과 일제 때 부친이 면장을 지낸 최연희, 김용균 두 의원의 입장 또한 같을 리 만무하다.
더 이상 전 국민이 친일 했으니 민족 원죄니 해서 씨부렁대지 말 일이다. 이건 그악스런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잡도리하던 수법과 다름없다. 가까운 비유를 들겠다. ‘대한민국을 위한 바른 선택 국민행동’이란 단체가 조순형 대표를 당선운동 대상자로 뽑으며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했기 때문이란 주석을 단 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다.
만신창이가 되어 통과된 친일규명법이란 무엇인가. 무릇 참여할 때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 참여한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친일을 후손들에게 떠넘기는 연좌제나 살생부가 아니다. 바로 우리 한민족에게 현재진행형으로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말끔히 과거형으로 돌리려는 청산 그것인데도, 이 모양 이 꼴이니 일제시대 같은 상황이 온다면 독립운동 따위 안하고 순치되어 살겠다는 청소년이 느는 것 아닐까.
굳이 비유를 들면 친일에 대한 진상 규명이란 대서양으로 가는 물줄기인지 태평양으로 가는 물줄기인지를 가려내려 함이었다. 콜로라도 강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강의 경계선처럼 모호할지라도 하나의 획을 긋자는 것, 해서 바위에 새길 건 새기고 물줄기에 흘려보낼 건 보내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일제로부터 진정으로 해방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국민은 안다. 꽃샘추위에도 봄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처럼 알고도 가만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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