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조각이나 회화가 어우러진 건축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부조, 그리스의 조각, 중세의 스테인드 글라스, 근대의 철골 콘크리트 건축에 이르기까지 이 건축과 미술의 행복한 친화관계는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다. 다만 근대에 이르러 조각은 위인이나 정치가들의 기념조각이 고대의 신상을 대신하여 시가지로, 공원으로 침투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다시 20세기 미술의 추상화 경향에 힘입어 서구의 추상조각이 바다 건너 우리 시대 우리의 환경에까지 확산된다.
동양, 그리고 한국의 기념조각은 일본유학을 거친 조각가들에 의해 시작된다. 처음에는 청동조각이 곳곳에 깔리다가 때마침 불어닥친 서구화열풍과 고층건물 붐에 편승하여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 것이 이른바 건축장식조각이다. 1%법안이라 하여 건축비용의 1%를 건축장식미술에 투자하도록 하는 법안이 서슬 퍼렇게 건축주를 윽박지르는 틈새에 슈퍼스타로 떠오른 조각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급조된 조각문화인만큼 부작용도 많았다. 건축주와 알선책과 조각가의 야합이나, 심의과정의 잡음 등은 제도상의 문제점이다. 외부작가가 원천봉쇄된 지역미술계에서 엇비슷한 작품들이 융단폭격하듯이 시가를 도배하는가 하면, 설치한지 얼마 안가 퇴색하거나 흉물이 되어 민원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작가적 양식과 양심의 문제일 뿐 아니라 기본기나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여행 중 인물이나 추상조각을 보면서 왜 우리 조각은 이렇게 중량감과 박진감이 넘치면서도 공간을 유연하게 장악하지 못하는가하고 생각해본 일이 있었다. 나아가 회화적 화면구성까지 떠올리게 하는 청동조각의 부식처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조각은 역사일 뿐 아니라 문화의 척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기교에 있다면 과감히 밀랍주조법과 부식기술을 도입할 수 있다. 그것이 야합과 담합에 있다면 비공개 조사위원단의 철저한 기초자료를 근거로 국제적 평판을 가진 심의위원의 인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수준이 문제라면 지역작가들을 당당히 세계무대에서 평가받게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것, 우리지역만을 고집하는 인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랑스인이 만들었기에 자유의 여신상이 부끄럽다는 미국인을 만난 일이 없다. 이럴 때는 그들의 무신경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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