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환 퍼포먼스장에서 마주친 대전문협 리헌석 회장의 물음이다. 그렇다고 했지만 확신은 없다. 조금 전 현대갤러리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공갤러리 대표가 나더러 '최 선생님 아니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알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대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 안다는 것은 또 무엇인고.
몰입하기 전, 퍼포먼스의 초반은 늘 지루하다. 말했잖은가. 4분 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관객의 웅성거림을 채집하는 것이 전부인 J. 케이지의 '4분 33초'란 전위음악회를 연상시킨다. 잠시 피아노 연탄에 한 눈을 파는 사이, 고독한 행위예술가 류환은 진흙탕 속에서 뒹군다. 속에 여자도 들어 있다. 아니, 그는 고독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지? 천으로 둘둘 말려 볼 수가 없다. 아쉽지만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원고 마감이라는 행위가 내 행위를 제약했다. 뭔가 미진해 후다닥 컴퓨터를 치우고 전시장을 다시 찾으니 잔치는 끝나고 여직원 몇몇이서 피 같은 물감자국을 북북 문지르는 행위를 할 뿐이었다. 어디 갔느냐는 부질없는 물음. 밥 먹으로 갔을 거라는 부질없는 대답….
곁에는 문명을 상징하는 듯 컴퓨터 자판으로 만든 빌딩이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자판을 어루만지며 문득 류환이 컴퓨터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내가 아는 그는 문명을 거부한다기보다 자연의 반의어인 반자연을 거부한다 해야 진실에 가깝다. 그가 닮고 싶어하는 백남준이 브라운관으로 캔버스를 대신하듯 그에겐 대지가 캔버스요, 몸이 붓이고 말하는 입이다. 그렇게 문명 비판을 하고 지적 허영심을 뭉개는 것이리라.
함께 본 시사만화가 송태현 화백은 소감을 '후련하다'고 표현했다. 류환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나는 꿈틀거리는 류환을 보며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나 이것은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질병이며 화살이고 공포…'라는 숫타니파타를 떠올렸다. 의미와 무의미, 구속과 탈출, 있음과 없음의 틈새를 눈치챘다. 아무리 재미가 의미이고 돈이 문화인 시대라도, 그러나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올 겨울엔 유난히 퍼포먼스가 많았다. 수백명이 떼지어 스키와 보드를 타는 떼보딩과 떼스킹도, 수십만명이 만든 촛불 대행진도 퍼포먼스다. 하기야 우리 산다는 행위 자체가 퍼포먼스 아닌 게 없다.
류환이 찾아오면 좀 더 센 악수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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