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떠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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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떠나지 맙시다

  • 승인 2004-03-2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가을. 휘청거리면서도 자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품이 꼭 산전수전 다 겪었으면서 단아함을 잃지 않은 여인 같은 억새꽃들. 뿐인가. 소슬바람 한 자락에도 쓸쓸함이 묻어나고 불그족족 성급한 단풍은 바쁜 사람을 꾀려 한다. 억새나 단풍만이 아니라 쇼핑가 점두엔 가을남자, 그 옛날 참호 속에서 나온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운 추남(秋男)의 물결이 넘쳐난단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 보다. 온도와 습도가 내려가 피부에 자극을 주고 간뇌의 각성중추를 자극해 의식을 깨운다? 이런 의학적 설명은 외로워 옆구리가 시린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치 추울 땐 난로나 찐빵이 최고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봄엔 여자가 사색을 하고 가을엔 남자가 우울하다는 뜻에서 춘녀사 추남우(春女思秋男憂)라 했다. '여인이 봄을 품었는데 미남자가 그녀를 유혹한다'는 시경 구절에서는 춘기, 즉 사춘기라는 말이 생겨났다.

일본의 심리학자 가와이는 생의 가을을 느끼는 초로의 시룽새룽함을 싸잡아 '사추기(思秋期)'를 만들어냈다. 어느날 사랑의 보금자리가 텅 빈 공소증후군이 밀려오고, 그래서 뒤늦은 사랑앓이를 겪기도 한다.

굳이 화엄경을 믿지 않아도 좋다. 일천 겁의 인연으로 같은 땅에 태어나고 이천 겁의 인연으로 하루를 동행한다. 일 겁은 선녀가 버선발로 내려와 춤을 출 때 바윗돌 하나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 하물며 소중한 사람끼리 살을 맞대는 지금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인연인가.
최소한 올 가을엔 틱낫한이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고 넌지시 일러주는 음성을 듣고 그 밭에 무슨 씨앗을 뿌릴까를 고민하자. 바람 한 소절에 흔들리며 꽃이 되는 구절초처럼, 떨어진 자리가 고향인 코스모스처럼 살자.

포도주와 사랑은 묵을수록 맛있다. 이 말을 입증하려 당신이 로맨티스트일 필요는 없다. 무서리가 내리기 전에 아내에게, 남편에게, 연인에게 연서 한 장 보내고 우체부 아저씨를 학수고대했던 청춘을 되돌리자. 떠나지 말자. 특히 멀리 떠나진 말자.
"가을에 떠나는 사람에겐 '빠떼루'를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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