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여 성전에 나서라’고 북을 치며 엄호한 지식인들―그토록 존숭해 마지않았던 이병도・김활란 등 교육계 인사, 이광수・박종화・김동인・주요한 등 쟁쟁한 문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학병에의 권유문을 써서 그 강요된 ‘지원’을 지원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절대 아닐 거라고 믿었던 가람 이병기마저 친일 성향의 시 ‘12월 8일’을 남겼으며 게다가 조만식과 안재홍의 학도권유문까지 존재하는 이 어처구니없음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것은 한민족 전체의 원죄이므로 끌어안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입을 다물 것인가. 그때나 지금 또는 이후로도 권력에 사육당하지 않든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헤게모니를 강화하든 그 양자택일은 지식인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들은 체제 유지나 체제 변혁에 있어 언제나 선봉이었다.
지나간 20세기는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답습한 세기였다. 과학은 19세기 뉴턴의 만유인력과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의 계승이고, 행정이나 기업조직은 세기초의 군대조직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경제도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
복잡성(複雜性)으로 특징지워지는 이 새로운 세기에는 자기의 틀을 깬 모든 것, 보스 올(both all)의 발상법이 요구된다. 생물학자도 윤리학을 공부하고 윤리학자는 생물학을 공부해야 한다. 심심하면 불거지는 ‘개혁’인지 ‘계획’인지를 둘러싼 곡학아세(曲學阿世) 논쟁, 이문열과 황석영의 붓싸움, 그 사이에서 곱살끼는 이인화를 보면 다르면서도 같은 한통속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지식인은 때로 단호해야 하고 저항할 때 저항해야 한다. 한쪽에 휩쓸리기보다는 중심잡는 세력일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 아탈리가 ‘21세기 사전’에서 내린 지식인에 관한 정의를 지지한다.
세상의 광기를 자유롭게 관찰하는 사람, 확신시키기보다는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 지배하기보다는 매혹하려고 애쓰는 사람, 순응주의에서 벗어난 사람, 세상이 잠든 밤에도 깨어있는 사람, 눈먼 확신의 속죄양.
나치, 유신, 그리고 반지식인적인 공산주의 운동조차 지식인이 주도한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지식인이라고 조선송처럼 독야청청일 수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핑계 저 핑계 끌어대며 보수냐 혁신이냐 하는 등속의 입장 표명이 아니라, 그 입장에 터잡은 기본 양식이며 양심이 아닐까?
요즘 들어 부쩍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고궁을 나서던 김수영의 고뇌가 자주 생각난다. 나약한 지식인의 무익한 분노를 일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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