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 땅에서 공식적으로 인공기가 휘날리는 역사적인 ‘사건’을 보았다. 공동 응원가를 부르는 순간만은 이미 하나였지만 분단의 흔적만 어찌할 수 없었던지 양쪽의 ‘아리랑’은 발성이나 가사가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쪽에서 ‘통~일조국’을 연호하면 저쪽에선 ‘우리는 하나’를 외쳤고, ‘아리랑’을 부르면 ‘반갑습니다’가 화답으로 따랐다. 북한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는 동안 북한 응원단과 북한 서포터스인 ‘아리랑 응원단’의 열띤 응원은 그칠 줄을 몰랐다. 노래로 한겨레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얼마 안 남은 민족 동질성을 어디서 찾을지가 명백해진다. 언제 들어도 아리랑 타령은 누이와 함께 걷던 황톳길의 색조다. 생김새는 상사병 살짝 도진 옆집 순이 얼굴이랄까, 거기선 약간 땀에 전, 풀먹인 흰 모시적삼 냄새마저 난다.
해방 이후 아리랑은 행진곡에서 서양풍의 가요에까지 다양한 모습을 띠었다.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전남의 진도 아리랑, 경남의 밀양 아리랑 말고도 서울 아리랑, 경기 아리랑이 있다. ‘아라리요 아라리요 어헐사 아라성아’라는 독특한 여음을 가진 여주 아리랑도 있다.
하다못해 하춘화가 부른 영암 아리랑 같은 유행가 가락까지 흠뻑 사랑을 받았다. 과거 종두(種痘) 아리랑이나 한글 아리랑처럼 어떤 계몽성을 띤 경우도 있다. 독립운동 현장에선 독립군 아리랑이었고, 브라질 한인사회엔 상파울루 아리랑이, 연변 조선족에겐 연변 아리랑이 살아 숨쉰다.
한민족이 있는 곳이면 아리랑은 언제 어디서든 애환을 함께한다. 과거 가혹한 경복궁 공사의 징용에서도, 일제침략이라는 역사적 충격파를 뚫고 맥맥이 이어진 힘의 연원이다. 또 나운규의 영화에도, 조정래의 소설에도 살아 있다. 기독교인들이 즐겨 읽는 김성일의 ‘홍수 이후’에는 아리랑이 ‘아라랏 아라랏 아라리요’ 하고 아라랏산을 넘어 이동할 때 부른 노래로 설정되지 않았던가.
모두 3천여 가지로 추산되는 아리랑은 가짓수만큼이나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말투와 말씨를 총동원한 소리의 소리, 노래의 노래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한민족이 있는 한 가슴 속에 서리서리 살아 남을 아리랑. LA, 도쿄, 카자흐, 사할린 등등.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삼십육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팔월십오일에 만발하였다.
아리랑은 노소를 떠나,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어 민족의 노래임이 분명하다.
보라. 갈라진 남과 북이 어깨와 어깨를 걸고 응원을 펼친 지금이야말로 스포츠를 매개로 삼아 한겨레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어떻든 ‘작은 통일’이다. 나는 아리랑이 통일 조국의 국가(國歌)가 되리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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