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성의 한계와 기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할라치면 그때 일을 떠올린다. 우리가 잘 아는 로댕은 ‘이리스·신의 메신저’를 통해 다리를 쫙 펴게 함으로써 성기를 세세하게 노출시켰다. 그걸 처음 본 사람은 로댕식 사유와는 거리가 먼, 그 곰살맞지 않음에 실망할지 모른다.
롯데화랑에서 ‘전환된 이미지 전’이 열렸다. “꽃에서 성적인 이미지를, 여성의 성기에서 꽃의 이미지를 찾는 작업”을 한다는 신구대학 전흥수 교수야말로 에로틱하고 섹시한 꽃의 본질을 꿰뚫은 것이라 본다. 꽃은 페니스(수술)와 바기나(암술)를 공유하는 식물의 성기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터놓고 말하자면 생식기(生殖器)라고 불리던 것들이 애정기(愛情器)를 거쳐 이쯤 쾌락기(快樂器)로 호칭해야할 이 바람난 시절에도 터부는 여전히 건재한다. 어느 시대건 당대의 리얼리즘 자리를 언제고 넘보는 것은 성(性)이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표현의 한계를 어디까지 허용하는가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는 구속 기소했으면서 그걸 텍스트로 영화 ‘거짓말’을 만든 사람은 100만명이 관람한 다음에야 무혐의 처리된 것도 우습다.
좀 잠잠하다 싶으니 룰라 출신의 김지현을 두고 관객들은 실제 정사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리 리얼한 장면이 연출되느냐고 콩팔칠팔 난리란다. 즐기는 층이 항상 비판층인 것이다. 김지현은 현재 상영 중인 ‘썸머타임’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 ‘공사’하지 않고 찍었다”고 당당히 고백한다. (공사란 밴드나 천으로 주요 부위를 가리고 베드신을 찍는 것.) 눈 좋은 사람에겐 헤어누드가 얼핏 비치는 이 영화는 한 조각가의 열망이 사실일까 저주일까를 놓고 벌인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클레젱제의 ‘뱀에 물린 여인’이다. 뱀에 물려 몸을 뒤트는 여체를 재현한 이 조각상은 진짜보다 실감나는 관능미로 구설에 올랐다. 예술사는 몸을 둘러싼 갈등과 긴장의 기록인가 보다. 사실성을 추구하면서 그 사실성이 과도하면 안 되는 묘한 모순 구조를 갖는다. 음란성도 그렇다.
또 일반의 건전한 성욕을 유발할 것 같지 않은 사람과 성적 매력이 있는 사람이 함께 발가벗고 도심 한복판을 활보한다면 둘의 처벌 잣대가 다르냐는 것도 의문이다.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란 것조차 백인백색(百人百色)이고, 이렇다할 모범답안도 없어 늘 말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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