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이 막 돋기 시작한 형들을 따라 윤정희가 나오는 ‘순결’을 보았고 어설픈 사복 차림으로 하춘화쇼를 보러 다녔으니까. 사회를 맡은 젊은 이주일, 놀란 토끼 같은 하춘화는 지금까지도 인상적이다. 6살에 데뷔한 옛날옛적 그 하춘화가 46살이 되어 내가 사는 곳에서 쇼를 하고 갔다.
“장발 단속을 피해 다니던 70년대 그 시절,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있었다. 미니스커트가 경범죄에 걸리던 그 시절, 섬소년의 이정선이 나타났었다. 80년대는 대단히 황당한 시대, 그러나 유익종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를 노래하며 꽃처럼 향긋한 가슴들을…….”
관(管)과 현(絃)은 가고 디지털만 남은 현시대, 어느 기타 콘서트의 카피는 동시대인들의 발걸음을 붙들어맨다. 분노 반 낭만 반, 뒤범벅되어 물 좀 주소(한대수) 하며 외치던 자유, 하얀 손수건(트윈폴리오) 사이로 언뜻 보이던 희망이 실없이 돌이켜져서다.
검열과 저항의 코드가 사라진 지금, 독재정부의 대변자로 구박하던 그 옛날의 ‘대한늬우스’에서 격동기를 살아온 향수와 애환이 읽히는 것은 세상이 변해서일까? 왜 이 땅에 록이라는 장르를 선보인 신중현(그는 지금 충북 단양에서 문 닫은 학교를 빌려 작업장으로 쓰며 나름대로 음악활동을 한다)을 시시껄렁하게 여기다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이라고 이제야 추켜세우고 있을까? 지나간 날들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 되지만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서 그대로 둘 수는 없어서인가(호메로스).
그도 아니라면 어느날 문득 치밀어 오르는 그리운 것 때문이다. 집과 직장밖에 모르고 살다가 지하철 역에서 마주친 댄스 교습소 여강사의 외로운 시선에 끌리는 영화 ‘쉘 위 댄스’의 평범한 중년이 부러워진다. 이럴 때 ‘가사 전달이 확실한’ 옛노래 한 소절은 그대로 가슴에 와서 꽂힌다. 모차르트 음악이 오이를 벌레먹지 않게 하듯, 무심히 들어 왔던 이런 노래들이 그나마 우리를 덜 망가지게 하는 약이 아닐까 싶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자는 것이 아니다. 현란한 신시사이저 음과 알 수 없는 랩 사이에서 상호소통성과 호환성이 분명한 포크송과 통기타의 여운이 짙고 그지없이 향기로워서다.
아예 공급자 부재의 중년․장년문화에 굶주린 모든 이들이여. 물 좀 주소, 하고 외쳐 볼 수는 없는가! 그 옛날처럼.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