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이 그 곳 여고를 졸업했다거나, 아버지는 경상도, 어머니는 충청도, 처가는 강원도, 외가는 제주도이고, 호남에는 사촌누나가 살고 있다며, 자신을 ‘전국용’으로 호언하는 인사도 있다. 혹은 외가가 한강 너머 빤히 바라다 보이는 특정 지역이라며, 전에 선친께 열렬한 지지를 보내줬다는, 대(代)를 이은 인연을 상기시킨다. 이럴 때, 부모와 조상을 파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해도해도 먹히지 않으면 본관(本管)을 내세운다. 사돈의 팔촌까지 다 끌어모으다 모자라면 5대 선조 때까지 인근 무슨군 무슨면에서 살았다며 이번에는 족보를 들먹거린다. 정 궁하면, 군대 시절 지프 타고 잠깐 들렀던 쌈밥집 소재지가 지역 연고로 둔갑하는 지경이다. 참고 또 참아서 여기까지는 봐줄 만하다 치자. 도가 지나쳐 아주 나쁜 쪽으로 발전해 ‘영도다리론’, ‘목포앞바다론’에 이르면 살기가 등등해진다. 정치(政治)든 치정(癡情)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적인 권력요소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할 테지만.
옛소련의 후르시초프나 브레즈네프가 고향 사람들을 대거 기용했으며,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안팎의 패거리정치를 도모한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주의나 가신정치의 한 양태인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다. 지역 문제로 편두통을 앓는 나라들이 적지 않은데, 구미 각국에도 그들만의 지역주의가 있다. 스위스 같은 나라의 지방색은 온세계가 인정한다. 핏줄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동족의 언어를 쓰면서 알프스의 무수한 골짜기만큼 많은 독특한 정서와 자긍심이 흐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방자치가 잘 발달되어 있고, 피 튀기는 쌈질은커녕 7명이 1년씩 윤번제로 하는 대통령 ‘함자’도 잘 모른다. 우리처럼 지역주의 이데올로기를 애향심으로 포장해 권력의 흉기로 악용하는 시어빠진 정치인이 없으며, 여기에 휘말리는 또는 휘말리려는 유권자도 있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하기 좋은 말로 3김을 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자리를 당산파, 무당파 하는 무림처럼 계(系)와 파(派)가, 칠룡․팔룡파가 메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쉬운 예로 충청권이 대전․충남․충북권으로, 호남권이 광주·전남·전북권으로 갈기갈기 찢기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는가. 이제 지역감정은 으슥한 ‘복국집’ 골방이 아니라 백주에 텔레비전 앞에서도 거침없다. 도대체 국민을 뭘로 보는지……. 국민은 다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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