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참전용사들의 활약상을 모은 사진집을 만들었다. 백마부대 용사였던 사촌이 전선에서 꼬박꼬박 보내준 스냅사진으로였다. 그 중에는 야자수 아래 까닭 모를 웃음을 흘리는 베트남 여인도 끼여 있다. 거기엔 약간의 사연이 있지만 밝힐 계제는 아닌 듯하다.
베트남 패망 얼마 후에 나온 체험적 소설 ‘머나먼 쏭바강’의 정취는 늘상 나를 그 곳 가까이에 있게 했다. 나는 그 전체를 원고지에 베껴 쓰고 또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낡은 공병우식 타자기로 다시 두들겨 쳤을 정도다. 그것이 영화가 되기 전까지는, 응웬 빅뚜이는 가슴에 맺힌 여인상이었다.
그 끈끈함 혹은 강렬함 뒤에 많은 의문들이 사리사리 똬리를 틀었다. 허황된 진실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가 8년 남짓 연병력 32만명을 투입하여 피 흘리며 싸워줬고 미국은 하루 최고 2억 달러의 전비를 퍼붓고도 싸움에서 지고 명분에서 밀린 이유는 무엇인가. 베트콩과 월남군이 한 집에 공생하는 전선 없는 전선이 운명을 결정지었다 치더라도, 왜 싸우는가 하는 목적의식 없는 싸움이 가능할 수 있는가.
결국 지리멸렬하게 된 의문 속에 ‘미라이 학살사건’ 보도사진은, 만일 내가 기자가 된다면 종군기자가 되고 싶었던 계기가 됐다. 나는 종군기자도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다소간 불만족스러운 기자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사이공의 전쟁기념관에서 반전운동의 빌미가 된 그 사진 앞에 다시 섰을 때, 인연이란 것의 기이함에 모골이 서늘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베트남 패망 14년이 되던 해, 묘하게 역전의 월남 참전용사들이 모인 따이한 창립대회를 취재한 기자로서의 감회도 자연 남달랐다. 그 후에 조그만 상(賞)을 받고 해외연수 명목으로 또 이 나라를 찾았을 때, 나는 꼭 귀향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전혀 낯설지 않았으며 몽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단 하나, 도무지 인간의 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350km의 지하세계인 구치터널은 빼고서. 동행한 시인 조해훈은 ‘사람의 위대함을 보았다’로 시작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전사들의 슬픈 사연을 나는 모른다’로 끝맺는 시를 남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의 야수적 심성을 비웃으며 회생(回生)한 위대한 열대림에 경의를 표하고만 있다. 발자국 없이 걷기, 소리 없이 이야기하기, 연기 없이 요리하기, 보이지 않게 행동하기―베트콩 전투수칙보다 처절한 정글의 생존법칙이 되뇌어진다. 자꾸자꾸, 퇴색한 계절의 끝자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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