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제2왕자이니까 계모후인 조대비의 복상은 1년이 맞다(기년설․朞年說)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남인 윤휴는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나 다름없다며 3년설로 맞섰다. 결국 제1차 예송(禮訟)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고 그 전리품으로 서인이 집권했다.
그 뒤, 효종의 비 인선대비가 죽자 또 한번 싸움이 붙었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8개월)을, 남인은 기년설(1년)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남인 주장이 채택, 남인이 득세하게 된다. 이것이 제2차 예송논쟁의 실체이다.
왜 이 시점에서 예송 논쟁을 반추하느냐.
권력이 시끄러워서다. 언론사 세무조사를 놓고 ‘공정한 법집행’ 대 ‘언론 장악 의도’가 싸우고, 영해를 침범한 북한 상선을 놓고 ‘주권포기’ 대 ‘냉전사고’가 물고 뜯었다. 권력의 독주를 막겠다는 시민단체는 그들대로 조선조에서 흔했던 ‘예(禮)의 권력화’를 이룬 듯이 보인다. 폭력의 강제뿐 아니라 윤리의 강제도 권력의 한 양태인 것이다. 국민들은 의약분업 시행 초기를 기억한다.
편의상 이것을 ‘실제정치’에 대해 ‘윤리정치’ 혹은 ‘도덕정치’라 부르기로 한다. 과거 운동권도 그랬고, 현세적 권력에 반대하는 특정 윤리체계가 세력화함에 따라 권력화의 길을 걷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언론권력이란 것도 그렇다.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이건 ‘한경대’(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대한매일)건 공론화되어 정론이 되면 권력일 수 있다. 아니, 추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가령, 탤런트 채시라는 전성기 한때 남자들에겐 하나의 권력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종교도 그렇듯이 권력이란 꼭 윤리․도덕적이지만은 않다. 그것과 완전히 유리된 권력도, 완전히 일치된 정치도 어색하다. 거꾸로 탈도덕의(amoral) 양상마저 띤다.
나치스에 봉사한 독일 정신의학도 권력이었고, 이를 이용해 권력을 잡은 정상인(?)들도 권력이다. 청소년의 자위행위를 ‘비정상’으로 간주해 캠페인을 벌인 해괴한 19세기 권력도 있었다.
최근의 두드러진 경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권력의 다른 권력에 대한 견제, 권력의 해체와 세포분열을 향한 거대한 움직임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언론은 꼭 과거 유교를 닮았다.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측면과 견제하는 양측면이 특히 그렇다.
우리 사회의 갑론을박은 말하자면 현시대 예송 논쟁의 하드코어로 볼 수 있다. 조심할 것은 그(예송 논쟁) 끝은 늘 폭력이거나 숙청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가치나 권력만이 순수하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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