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를 넘나드는 박학다식함, 경계를 침범하는 자유로움, 묘한 카리스마, 그리고 '에~'를 곧잘 붙이는 쇳소리 강의―. 그를 특징짓는 요소들이다.
체 게바라라는 혁명가가 있었다. 본명은 게바라 에르네스토. 연설할 때마다 아르헨티나 사람 특유의 감탄사인 '체(che)~'를 연발한다 해서 얻게 된 애칭이다. 김용옥에게서 체 게바라를 이미지가 떠올려지는 건 화법 때문인가. 삶 자체가 혁명적이어서일까?
어머니가 지어준 한복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어정쩡한 폼마저 공자 묘에 엎드렸다 막 일어난 사람의 그것으로 마구 폄하되고 있을 때, '저게 바로 권력'이겠거니 했다. 사회로부터 권력을 받는 것 자체가 권력의 발생이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권력화와 찬반의 희롱물이 되어가는 데 대한 '펑크'가 아니다. 생애 두 번째 취직으로 내달 2일부터 문화일보 기자가 된다. 방송 강의 중에 기자를 혹평해서 오만하다는 평을 받은 도올이 말이다.
그는 장점은 징검다리 구실에 있다고 본다. 돌의 속성을 잊고 길로 변신한, 그리하여 건너고 싶도록 사람을 유혹하는, 그 피안(彼岸)에 철학이라는 변종된 과실이 있는 징검다리 같은 것. 이치상으로 언론도 이와 상통한다.
도올의 화법을 빌려서 바꾸면, 철학이 그렇듯이 언론은 개인적 수행의 장이 아니며 언론인은 각자 처한 사회로부터 공증을 받아야 한다. 그는 비틀스의 '렛 잇 비'에서 노자의 무위자연을 읽었다. 멋모르고 필자는 '예스터데이'에서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버섯은 한 달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 하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읽었지만, 언론은 '스스로 그러함'과는 거리가 좀 있다.
그의 방귀론을 기억한다. 방귀를 모르는 자에겐 센 방귀를 뀌어 그 방귀가 방귀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도 언론의 임무다. 권력의 그렇듯이 언론의 힘도 다양성에서 나온다.
선과 악, 희망과 절망, 현자와 어리석은 자, 도올과 비(非)도올. 이런 다양성 하나만으로도 그의 기자로서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얼마간 할지는 모르겠다. 며칠을 하다 그만둬도 상관없다. 다만 하는 동안만이라도 달팽이집만한 집을 차고 앉아 안주하거나 쇠똥구리․말똥구리처럼 쇠똥․말똥이나 다투지 말고 좋은 기자로 태어나기 바란다. "반갑고 기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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