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의 너무도 확신에 찬 자서전을 읽으면 그 힘의 원천이 늘 궁금했다. 신의 축복이라고까지 일컬었던 신비스런 황금분할도 끝내는 무리수로 정리되었듯이 ‘절대’란 것이 없을진대 이 세상에 100%가 가능한가.
돌이켜보니 유․소년기를 통틀어 내 꿈은 많았고 자주 바뀌었지만 그 꿈이 부자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은 부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의 그가 쌀가게 점원이었다는 말을 같은 연배인 선친께 듣고 이 다음에 나도 쌀가게를 하나 차려야겠다는 생각은 잠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씨름하는 왕 회장을 떠올릴 때마다 저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 장면을 연상하곤 했다.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왕처럼 나는 그가 틀림없이 고구려인일 걸로 생각했다. 정경 유착, 수렴청정, 족벌 경영―시대의 큰 물결이 어떠하든 어떤 언어로도 폄하(貶下)할 수 없는 한국 산업화의 증인이자 주역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1%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능률성과 정확성, 성취욕에 대한 반론으로 임어당이 내세운 99.9%가 아닌 얼마간 놀고 빈둥거림이라는 0.1%의 멋진 가설도 왕 회장에게는 도통 통하지 않았다.
그가 곁부축을 받는 몸으로 계동 사옥에 나타났을 때였다. 이제는 늙었구나, 1%의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하겠구나는 느낌이 막 들기 시작할 무렵, 소 한 마리를 훔쳐 떠나온 고향에 대한 빚갚음으로 소떼를 몰고 홀연히 북한에 갔다!
‘워낙 왕 회장이란 분은 단 1%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구나.’ 나는 내 고정관념을 깨끗이 수정하기로 했다. 노벨이나 아인슈타인이 훌륭한 것은 다이너마이트나 원자폭탄의 절대적 위력이 있게 한 99%의 공헌보다 그 절대적 위력이 인간 이성의 1% 판단 착오로 전인류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 점이다. 그렇듯 1%의 여유를 찾기보다는 늘 1%의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던 왕 회장은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 위를 걸었던 분이라는 걸 무욕(無慾)의 나라로 떠난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때로는 심한 고독감을 삼키며 건넜을 그 팽팽한 밧줄은 모든 대중이 쉽게 걸을 수 있는 탄탄한 길이 되었으리라.
집이든 차든 길이든 전자제품이든 이 땅에 사는 사람 치고 그와 무관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99%의 당연한 것의 반복보다 늘 무심히 지나치는 1%를 몸으로 보여준 고인에게 100퍼센트의 안식과 명복만이 있기를 삼가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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