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마라(혈압 오른다). 둘째, 연예인 하지 마라(몰래카메라가 튀어나와 언제 인터넷에 올려질지 모른다). 셋째 모모 하는 금융기관에 돈 넣어두지 마라(별로 불우하지도 않은 이웃 돕게 된다). 넷째, 택시운전하지 마라(연예인이 꽁무니 들이받고 달아나면 본전도 못 건진다). 다섯째, 아프지 마라(의약분업으로 병원, 약국이 언제 불시에 문 닫을지 모른다).
한낱 우스개이지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우리 사회 병리가 반영된 것이다. 의약분업 사태가 한창일 때였다. 오전 진료만 하는 안과에 들렀다가 벽에 표구된 채 걸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유심히 다시 읽어 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어떤 탄탄한 주장보다, 잘 씌어진 칼럼 수십 편보다 힘있는 해결책이 담겨 있었다.
어디 아프냐고 물으면 “의사가 되어 가지고 그런 걸 왜 묻냐”는 환자가 있다는 얘길 어느 의사에게서 들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척 아는 신의(神醫) 정도의 경지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심신이 나약한 환자일수록 여전히 의사를 절대자인 양 믿고 또 기대고 싶은 것이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그가 꿈꾸는 의료제도를 그렸다. 우리 임꺽정이 들쑤시고 일어나 난리를 피우기 6년 전쯤에 쓴 책이다. 여기엔 나라의 사방, 성벽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마치 작은 도시 같은 병원이 나온다. 남자들은 벽쪽에, 임신한 여자들은 급할 때를 대비해 문 가까이에 앉힌다. 자기 집에 누워있는 곳보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편하므로 누구나 입원하려 한다. 말 그대로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그보다 한참 뒤에 나온 이익의 ‘성호사설’ 가운데 의국론(醫國論)이 있다. 아홉 가지 병을 다스리는 의사의 본업(本業)과, 병든 나라에 생기는 여덟 가지 결점을 치유해 나라를 만드는 개혁이 다를 바 없다고 본 것이다. 무릇 병증세만 들음은 환자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뜻을 요 며칠 전에 국민과의 대화라는 걸 보고서야 제대로 깨우쳤다.
사실 이 의약분업 문제도 시작부터 개혁의 차원에서 차근히 접근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사제는 내 것이고, 알약이 어떻다는 주장은 밥그릇 타령에 가깝다.
무엇이 원칙이며 무엇이 국민에게 최선인가를 기준삼는다면 금방 해결의 가닥이 드러날 일이다. 세종대왕이 여덟 가지 의사론(八醫論)에서 지적한 대로 생사람 잡는 살의(殺醫)말고 환자 마음부터 안정시키는 심의(心醫)는 몇이나 될까? 만백성의 시름을 슬퍼하며 민망히 여기는 정치가는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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