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그곳 개량서당에선 천자문이건 명심보감이건 한 권을 떼고 나면 떡을 치고 전을 지지고 하여 잔치를 벌였다. ‘책씻이’라는 세책례(洗冊禮)였다. 본디는 ‘지혜 구멍’이 송송 뚫리라는 바람에서 송편을 차렸다. 스승에게 감사, 동문에게는 격려가 된 흐뭇한 의식이었다.
이것은 깨끗함과 후련함을 다 안겨주었다. 말하자면 정화이기도 했다. 먹고 난 그릇을 씻부시며, 몸뚱이의 때를 씻가시게 함도 그러한 정화 행위다. 주로 나쁜 쪽이지만, 어떤 일에서 관계를 끊을 때 ‘손씻는다’ 한다.
남의 수고에 사례하면서 주는 돈과 물품은 ‘손씻이’라 부른다. 또, ‘발씻는다’는 말도 더러워진 발을 씻듯 과거 허물을 씻어버리고 새 사람 된다는 다잡음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코 아래 진상(進上)’이 제일이라고들 한다. 이와 관련된 ‘돈세탁방지법’도 한탕 해먹고 돈의 출처와 경로를 감추는 ‘돈씻이’가 주경계 대상이다. 누가 혹여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퍼뜨릴 기미가 보이면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 입을 막아야 한다. 이때 동원되는 금품이 ‘입씻이’다. 미주알고주알 입방아 찧을 ‘입을 씻기어’ 근원을 차단하는 것이다.
서울 세검정을 지나치다 우리가 사관(史官)들 흉내만 제대로 냈어도 이처럼 혼탁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쓴다는 사관들은, 실록을 완성하면 그 바탕이 된 사초(史草) 원본을 세검정 냇물에 씻어 글씨를 지웠다. 이를 세초(洗草)라 했는데 자칫 당쟁에 악용되는 등 분란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조처였다.
살다 보면 좋은 말만 들을 수 있으랴만 소음과 다름없는 말의 성찬을 접하면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부럽기만 하다. 요(堯)임금에게서 천하를 양보하겠다는 말을 들은 허유는 도저히 들어서는 안될 이야기로 여겨 기산(箕山)에 숨어 냇물에 귀를 씻었다. ‘귀씻는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마음은 없고 물질이 너무 설치는 이 시대. 상소리를 들어도 서둘러 돌아와 귀씻이(洗耳)를 하고, 저잣거리에서 개가 흘레하는 것을 보고도 눈을 씻었으며(洗眼), 물레방앗간만 보고도 먼 발치에서 돌아갔던 선비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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