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 중계를 들으면 저게 종군기자의 전황 보도가 아닌지 혼동될 때가 있다. 신문 체육면의 단골 전쟁 용어가 사회면을 거쳐 정치면(전초전, 성명전, 선거전, 공방전)을 차지했다. 약진한 당세를 교두보로 차기 대권 전쟁에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파상공세만 펴는 꼴이다.
정치적 사건에 단골로 나도는 표현들(선전포고, 속전속결, 입성, 최후통첩, 무장해제)도 그렇고, 정치인들은 아예 능률적인 군 편제(TK사단, 민주당 2중대)의 형태를 띠기에 이르렀다. 삼천리 방방곡곡은 군사작전 지형(교두보, 요충지, 보루, 고지, 아성)으로 재편돼 심심하면 지원사격과 대리전을 치르기를 일삼는다.
외국의 일인데, 한 시민이 국방부에 질의서를 냈다. “차렷, 쉬어 같은 반말 명령을 해도 되는 겁니까? 제복을 입은 국가시민에 대한 명예훼손 아닙니까?” 하는 요지였다. 적을 눈앞에 두고 “신사 여러분, 사격하시기 바립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조금만 약진해 가시겠습니까?” 한다면 군의 생명인 명령 실행의 동시성은 맛을 잃게 될 것이다. 덤터기씌우자는 게 아니라 군대 문화가 얼마쯤 말을 얼병들게 한 건 사실이다. 흥부전 시절만 해도 나랏님에 오르면 수라, 양반이 잡수시면 진지, 하인이 먹으면 입시, 제사에는 진메이던 것이 식사로 굳어졌다. 민간의 잠, 옷, 쉼은 군대의 취침, 복장, 휴식에 거세당했다.
군대 체험은 우리 정서의 공통분모이지만 옛 일본 군대식으로 구두에 발을 맞추는 부조리를 낳은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취직해 봐야 사단장이나 대대장이 사장이나 전무로 바뀌는 정도요, 명칭은 감봉이다 징계다 해서 다르지만 ‘빳다’나 기합 같은 게 있다는 지적처럼, 요리조리 요령 피는 처세술, 시키지 않으면 안 하고, 틈만 생기면 놀고, 마셨다 하면 끝장 보는 기질, 이런 것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너는 살아 있다
십이월의 화투짝에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끝에
눈 덮인 읍사무소 뒷마당에
추억의 사진첩에(이동순의 ‘히노마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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