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족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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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족 스승님?

  • 승인 2004-03-04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세상 읽기가 힘들어졌다. 카바레의 제비족처럼 손만 잡으면 모든 걸 안다면 어떨까? 그 감촉만으로 상대가 호스티스인지 면도사인지, 재산은 얼마큼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남들이 ‘예’ 할 때 ‘아니오’ 하는 경지도 광고가 아닌 다음에야 호락호락하지 않다.

심리학자 에릭 번은 인생에 대한 기본 자세를 몇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I'm ok, You're ok. 둘째, I'm ok, You're not ok. 셋째, I'm not ok, You're ok. 넷째, I'm not ok, You're not ok. 우리에겐 첫째의 나도 옳고 당신도 옳다, 나나 당신이나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가 요구된다.

부산 오륙도에 다녀오는 길에 영도다리를 지나는데, 운전기사가 그 자리에 세계무역센터 건물보다 높은 107층짜리 건물을 짓는다고 자랑삼아 일러주었다. 그러면서도 부산 인구가 줄어들고 발전이 더디다는 푸념을 빼놓지 않았다. 아마 서울 사람들은 서울 사람대로, 도쿄나 워싱턴에 비교할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중도일보(대전)에는 ‘조흥은행 본점 청주 이전설’이 1면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조만간 충청일보(청주)에서는 이를 열렬히 환영하는 기사를 올릴지 모른다.

방금 배달된 매일신문(대구)을 보니 1면에 ‘작아져만 가는 3대 도시 대구’ 제하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웃 부산에선 월드컵 조추첨도 하고 국제영화제가 열려 세계 속으로 쌩쌩 신나게 도약하는데 대구는 뭐냐는 거였다.

옳고 그름, 그 기준은 무엇일까? 명이 망하고 변방의 청이 중국을 접수할 때 우리 일각에서 제기한 ‘조선중화주의’ 자존심이 상기된다. 오래된 신문에서 ‘유신 이념 구현’ 운운의 사설을 읽었을 때, 시대 윤리를 챙기게 된다.

전에는 빨간 매니큐어는 접대부나 칠하는 줄 알았다. 청바지에 장발이 유행할 때만 해도 기지촌 양공주가 아니고서는 노랑머리를 구경할 수 없었다. 지금, 머리털이 아닌 뇌를 물들이자 해본들 곧이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변화는 빠르다. 인터넷이 이룬 웹혁명(webolution) 이상이다. 상보다 상금, 염불보다 잿밥이 통하고, 문명의 충돌(헌팅턴)만 있지 쌍방적인 ‘I'm ok, You're ok'의 문명의 공존(하랄트 뮐러)은 안중에도 없다. 개량이나 세계화도 좋지만 파리의 한복 패션쇼처럼 민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저고리를 배꼽티로 만든다면 이거 말이 아니다.

별도리 없이 우리는 부드러운 커피에 중독되듯 하루하루 이 세상에 중독되어 산다. 마음이 졸우(拙愚)해질수록 새기고 싶은 연암 선생의 말씀이다. 어떤 이는 이를 비판하지만,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되 기본틀을 지키려는 법고창신(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知典)의 자세는 늘 필요하다.

제비족의 경험을 빌릴 것도 없을뿐더러 가끔씩은 구태의연한 것이 좋다. 문제는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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