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은 동쪽이며 해돋이를 상징한다. 동방의 나라, 코리아를 청구(靑丘)라고 한 연유가 이것이다. 또, 청신호, 푸른 신호등의 파랑은 출발을 암시한다. 가끔 녹색 신호등이다, 푸른 신호등이다 해서 옥신각신하는 건 한국 사람이라는 증거다. ‘파랑’이나 ‘푸르다’는 풀(草)에서 나왔다. 한자로 토를 달아도 ‘푸를 록(綠)’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파랑은 영어의 그린이나 블루, 아니 영어를 포함한 서양 언어의 청색과 녹색이 모두 포함된다.
미술시간에 배운 색상환은 젖혀두자. 물감의 3원색은 빨강, 녹색, 파랑이다. 파랑 물감에 노랑 물감을 섞어야 녹색 물감이 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어야 한다. 녹수청산(綠水靑山)은 푸른 물과 푸른 산이다. 청이 녹이고 녹이 청이었다. 산도 들도 파랗고 하늘도 파랗다. 파랑 풍선을 불어 연해지면 하늘색이니, 하늘색도 별것 아니다. 제관들이 입던 남빛 옷을 남삼이 아니라 청삼이라 했다.
한민족에게는 초록, 남색, 감색, 하늘색이 온통 파랑(靑)이었다. ‘파르께하다, 푸르께하다, 파르대대하다, 푸르뎅뎅하다, 파르스레하다, 파르스름하다, 파르족족하다, 파릇파릇하다 등 파랑을 나타내는 단어는 수백 개를 만들 수도 있다.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어느 족속에겐 똑같은 고깃배가 가뭇없이 사라졌을 때, 머다랗게 돛만 보일 때, 뭍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때의 배 이름이 각가지다. 에스키모에겐 내리는 눈 다르고, 쌓이는 눈 다르며, 얼려서 얼음집을 지을 때 쓰는 눈이 각각 다르다. 한국인이 그들을 속이고 간 날(이런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내리던 눈도 다를 것이다.
우리는 풀과 친한 민족이다. 높은 봉우리에 구름 걷히니 ‘푸른’ 꼭대기 드러난다고 읊은 이는 서화담이었다. 마당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흙에서 자란 지용은 ‘파아란’ 하늘빛을 그렸다.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짓도 않는다.’ 이상의 ‘권태’는 이상하게 청과 녹을 구분한다.
봄은 가더라도 여름빛은 날로 짙푸르니 좋다. 새색시처럼 녹의홍상 곱게 차린 봄날이 가버렸다고 한탄할 것 없다. 여름도, 가을도 마찬가지이다. 청년에겐 청운의 꿈이, 청년이 아니더라도 파랑은 기쁨과 소생, 그리고 대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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