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숲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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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숲을 만나다

  • 승인 2004-03-2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어느 겨울 한 철을 보낸 강원도 태백의 폐광촌에 들어설 무렵, 보령 사람 이문구가 생각났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 찾아온 후배들에게 참외를 깎아 주며 “그래, 너희들 어떻게 지내니? 석영아(황석영을 말함) 아직도 소설이라는 거 쓰냐?” 하는 게 소원이라더라고 유홍준이 소개한 이문구. 그의 ‘장이리 개암나무’가 퍼뜩 스친 건 그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나무들을 원없이 보고나서였다.

“보니께 나무가 미끈허질 않구 다다분허니 영 개갈 안 나게 생겼네유. 그런디 안 없애구 왜 그냥 내버려두신댜. 밭둑에 있는 나무를 살리니께 올 적 갈 적에 거리적거려쌓서 일허기만 망허구 들 좋더면.”

바로 이같이 볼품은 없으나 각지의 해안이나 섬과 곶에서 수십, 수백 년을 조선의 그린벨트 제도라 할 금산법(禁山法) 덕에 근심 없이 자란 조선송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지금은 많이 망가졌지만, 안면도가 아직 저리 좋음은 세조가 안면송 보호를 위해 주민들을 독진으로 이주까지 시킨, 눈물 젖은 역사의 소산임을 누가 알아주랴.

뭇 선남선녀들이 하도 만져 새까맣게 된 석불의 엉덩이를 확인하고 나오면서는, 못난 잡목들이 잘리지 않고 버텼기에 산야가 이나마 단조로움을 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도감도 맛보면서 성기조 시인이 ‘숨막히게 달려와 비오듯 땀을’ 흘리며 ‘조선소나무가 절하는 영월 산자락에서 단종을 만났다’고 노래한 청령포, 그 곳을 지났다.

코스를 일탈하여 즉흥적으로 찾은 수덕사에서는 국보인 대웅전보다 고암 이응로가 머물던 수덕여관의 초옥(草屋)에서 잔정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거기에서 카메라가 작동이 안 됐던 이유를 아직 모른다. 금강역사(金剛力士)를 조성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화백이 머물던 사적이라는 안내와 나란히 찹쌀막걸리와 부침개를 판다는 문구가 왠지 보는 이를 처연하게 한다.

여행길에 정철이 ‘장진주사’에서 저승에 비유한 백양(白楊)을 만나서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저울질하며, 죽음을 초탈할 수 있다는 만용도 부려봤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중략)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숲에 가기곳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회오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후략).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니다. 나무들의 소곤소곤하는 속심까지는 몰라도 나무가 손으로 들어가고, 수액이 팔로 올라갔다는 시인의 감정이입이라고나 할까? 이 땅의, 민초(民草)의 숨결까지도 이어온 ‘개갈 안 나게’ 생긴 개암나무 같은 존재들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이며 ‘살을 베면 피 대신에 나무 진이 흐를 듯하다’는 가산 이효석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착각이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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