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칠성장어의 뇌를 로봇에 이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기계에 동물을 결합한 사이보그가 탄생한 것이다. 이식된 뇌는 전자눈을 통해 빛을 인식해 바퀴에 명령을 내려 작동한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신화와 주술의 시대, 돌도끼를 만들던 시대에도 존재했을 과학철학을 일으킬 때가 도래한 것 같다. 멀게는 고대의 아르키메데스도 그랬고, 아인슈타인이 원자탄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침략자들을 막기 위한 보편적 인간애나 인류애가 아니었던가.
과학의 목적이 과학이어서는, 더욱이 노벨상이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왠지 낙후되었고 못 살 것만 같은 파키스탄도 노벨물리학상을 탔고 일본의 유가와 박사는 패전 후 노벨상을 받아 실의에 빠진 자국민들을 위안했다. 유념할 것은 상을 탔다고 과학 수준이 하루 아침에 드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봉주 선수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으로 우리 국민의 힘이 갑자기 펄펄 세지지 않았듯이 말이다.
인간은 동물이라고 다윈이 말했다. 데카르트가 동물은 기계라고 말했다. 라메트리는, 그러므로 인간은 기계라고 말했다. 억지로 짜깁기했지만, 지능형・인간형 로봇들이 전쟁을 치르고 노약자를 돌보며 영화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망연자실 즐거워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삼단논법(三段論法)이다. 기실 사람들은 장차 그것들이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미노타우로스처럼 당혹스런 괴물이면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나 방비책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난 세기, 과학과 기술의 결합은 괄목할 성공을 거둔 반면 정치・사회・사상 면의 진보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마치 인류가 과학이라는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이 기술과 결혼해 어미를 배신했고, 어미인 인류는 자식을 어떻게 대하나를 몰라 쩔쩔매는 형국이다. 인간의 자아와 심리적 세계는 무궁무진한 정보공간 속으로 함몰되어 가는 듯이 보인다. 생명체 게놈이 해독된 이 시점에서 새로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네오포비아)에 처한 우리에게 필요한 명제는 몰락해가는 과학 정신을 어떻게 부활하느냐다.
만약 기계가 사람과 동격시되는 날, 기계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는가. 하이데거의 지적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 품위는 내팽개치고 기계인간, 다시 말해 사이보그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를 엄숙히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진지한 물음은 과학의 달이 지나가더라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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