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은 생명의 씨앗이자 샘이라고 찬양한 이는 에라스무스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남녀가 어찌 몸을 섞고 어찌 해산의 고통을 치른 뒤 둘째, 셋째를 가질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어리석으면 안 되는 때가 있다. 한 가지만 보기로 한다.
만의 만 배가 거듭될 때마다 억・조・경 등이 나온다. 서양에서는 천의 천 배가 거듭될 때마다 빌리언・트릴리언・콰드릴리언 등 수이름을 쓴다. 어쩌다 자료에 500만을 5000천으로 적고 있는데, 참 정신나간 짓이다. 무늬만 한국말이지 한국말이 아니다. 이러지 말았으면 한다.
나 개인은 어려운 책을 읽게 되더라도 글만은 쉽게 쓰려고 애쓰는 편이다. 과학이고 법률이고 의학이고 그만 좀 딱딱해졌으면 좋겠다. ‘영화로 읽는 경제학’(최병서, 형설출판사)은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가령 ‘귀여운 여인’에서는 소비의 잉여와 서비스업의 가격 차별(정해진 가격이 없다는 것) 원리가 나온다. ‘은밀한 유혹’에서 백만장자와 하룻밤을 치른 아내에게 남편이 “얼마나 좋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전혀 좋지 않았다”고 말해야 신상에 이롭다. 폴 사무엘슨의 ‘현시선호이론’에 따르건대 이래야 정답이다.
쉽다는 것은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서울에서 결성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도 밥이나 먹고 사진이나 찍자는 가벼운 모임이 절대 아니었다. 겉모습은 다양한 전공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자들과 예술가들까지 가세한 범(汎)인문학의 성격을 지녔다. 가뜩이나 외국이론의 수입상, 대리전쟁터라고 눈총받는 마당에 우리 자생이론을 만들려는 그 속심은 꽤나 알차고 단단하리라 짐작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포겔 교수가 서울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한 걸 들었다. 한국인들이 모방하려고 안달복달인 서양이 동아시아를 앞지른 시점은 고작해야 1750년부터라고. 다소간 어폐가 있으나 의미는 심장하다. 일상세계와 학문세계의 불합치를 낳은 서양 일변도에 대한 경종(警鐘)으로 들린다. 이 모임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식, 지식과 지식을 잇는 돌쩌귀 구실을 너끈히 수행하기를 기대하는 건 그런 자각에서다.
단순히 즐문토기(櫛文土器)를 빗살무늬토기로 바꾸는 한글사랑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된다. 보다 더, 전통과 현대와 미래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번역・번안 수준에 머문 학문의 발전뿐 아니라 문사철(文史哲=문학・역사학・철학) 등 인문학 위기론에 대한 값진 대안이라는 측면에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내려 한다.
잠 못 이루는 밤, 먼 이국땅 침상에서 트랜지스터로 듣던 모국어의 감격을 아는 분이라면, 모국어는 우리 정신의 샘, 하나님 또는 부처님의 마루라는 말에 선뜻 동의하려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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