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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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을 기다리며

  • 승인 2004-03-04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극우파 장 마리 르펜은 우리 식으로 ‘대통령병 환자'다. 그의 돌풍은 프랑스 현대 정치사의 최대 이변이다. 당선의 문턱에서 좌절됐지만 그로 인해 ‘르펜현상'이란 말까지 생겼다. 그는 1974년 대선에 처음 나선 이후 근 30년간 단골 후보였다.

우리에게도 대선 때면 나타나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진복기, 신정일, 김옥선…. 이제 또 잊힐 만하니 김옥선씨가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최근 아주 흥미로운 책을 한 권 읽었다.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이종욱, 김영사).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다. 읽고 나니 꽤나 비싼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여왕 즉위에 대한 구구한 학설을 잠재우고도 남을 저력을 지녔다고 본다.

그간 여왕의 즉위를 놓고 모권(母權)사회의 잔재라는 주장이 왕왕 있어 온 게 사실이지만, 실은 나 같은 문외한조차 이에 동조하기 힘들었다. 여왕의 즉위는 그보다 부계(父系)를 유지시키려는 비상조치였다. 한 예로, 제26대 진평왕에 이르러 성골 남자의 부재 속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성골인 선덕여왕의 즉위였던 것이다. 성골의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선덕의 사촌) 때도 이와 같다.

한가하게 골품제 따위나 두둔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비약으로 들리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망 없는 한국 정치의 돌파구를 발견했다. 미래의 국가 성장 모델에 있어서 여성 인력 활용의 극대화는 필연이다. 저명한 컨설팅회사 매킨지의 ‘우먼 코리아’ 보고서도 한국의 선진국 진입 요건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90%대를 지적한다. 여성 대상의 여론조사에서 둘 중 하나가 20년 안에 여성대통령 출현 가능성과 함께 추미애, 박근혜, 한명숙 등을 후보군으로 꼽고 있다.

현재 지구상의 여성대통령들을 보면 어떤 희망이 읽힌다. 밀레니엄정상회의 공동 의장을 맡은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은 북유럽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핀란드 여권(女權)의 상징으로 불린다. 남성 동성연애자협회 회장을 맡은 특이한 이력이 있는 할로넨은 취임 후 연하의 동거남과 결혼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도 했다.

역시 여성대통령인 메리 맥아리스 아일랜드 대통령이 핀란드를 방문, 대통령궁 앞 환영행사에 여성끼리 나란히 참석한 모습은 보기에 참 좋았다. 그리고 파나마의 첫 여성대통령인 미레야 모스코스는 세 차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때마다 쿠데타로 물러나야 했던 아르눌포 아리아스 대통령의 부인이기도 하다.

여성대통령은 미국에서조차 아직은 ‘멀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단계이긴 하나 우리도 여기에 기대를 걸면 어떨까 한다. 퍼스트 레이디 출신으로 여성대통령 후보로까지 주목받는 힐러리는 상하이 방문시 “미국과 중국의 여성대통령간에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길 바란다”는 발언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다.

더 생각해 보자. 영국에 마거릿 대처, 인도에 인디라 간디 총리가 있었으며, 아이슬란드에 빅디스 핀보거도티르 대통령이 있었다면, 우리에겐 최초의 여성임금인 선덕여왕처럼 슬기로운 인물이 있었다. 지역, 계층, 성별에 매이지 않으며 통일시대를 주도할 신선한 여성대통령감, 어디 없을까? 그리고 언제쯤 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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