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유행어란다. 미디어는 좋고도 무섭다.
때는 15세기. 궁궐 앞 포졸의 검문을 마치고 세종대왕을 인터뷰한 뒤 글을 올린다. 이름하여 동화작가 신정민이 올린 ‘신돌이의 위인과의 가상 인터뷰’.
“전하, 어린이들이 책 읽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훌륭한 동화 속에는 평생 동안 가슴에 남을 세상에 대한 지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지혜 등이 스며 있기 마련이지. 또한 끝없는 상상력과 건강한 웃음도 있단다.”
‘대왕’의 원론적 말씀이 없더라도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꾼다는 데엔 쉽게 ‘아멘’을 외치게 된다. 조선일보 사회면을 뒤적이다 아들에게 물었다. 너 메가패스 장군 아니? 그럼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모두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불러요. 그러면서 ‘메가패스 장군’이 주무대인 바다로 진출했다고 덧붙인다. 큰일났다. 광고발이 너무 세구나.
세종로나 현충사에 간 아이들이 “저기 메가패스 장군 있다”고 소리친다던데 그냥 개그가 아니었구나. 더 솔직히는 겨우겨우 읽힌 위인전 약발이 한 방에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해서 더럭 겁이 났다.
전설의 정복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어린 시절의 그는 언변도 없고 키가 작아 놀림감이 되면서도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이 출몰하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이 그를 만든 것이었다.
근간에 위인전 다시 쓰기가 유행한다. 토정 이지함, 명의 허준 등을 다룬 만화책이 속속 등장한다. 영양가만 높아도 섭취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서점 한 켠에 우리 장군들을 밀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등 일본 장군들이 판을 치는 기현상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옷태를 살리려고 찔러 둔 마네킹의 시침핀들처럼, 위인전이란 것이 엘리베이터 속의 우울한 잠언처럼 죽은 말(言)들의 집이 되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아까 그 아들 소원 풀어주는 폭 잡고 늦도록 ‘임진록’ 게임을 했더니 이건 정말 우습지도 않다. 이순신이 당나라와 싸우는가 하면 허준, 이율곡까지 합세해 피터져라 싸움을 벌이는 게 아닌가. 급기야 신사임당까지 나와서 남자들의 ‘기’를 충전시키는 역할을 도맡는다.
걱정이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자존의 알레고리(상징)인데 로봇 태권 브이보다 인기가 못하다니 광고 문안처럼 유쾌, 상쾌, 통쾌가 아니라 불쾌 또 불쾌할 것이다. 이것이 혹 ‘왜란종결자’(‘퇴마록’ 작가 이우혁의 판타지 소설)라는 판타지를 읽고도 외려 불경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 세대가 갖는 노파심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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