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그는 세계화의 깃발 아래 우리 것을 팽개치는 오늘의 우리보다 문화의식을 잘 갖췄고 그 지표를 제시까지 했다. 다산 정약용이 ‘전무후무한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면 김부식은 ‘신지식인’이었다. ‘용가리’같이 웃기는 영화는 만들지 못했지만.
‘왜 한국을 떠나야 하는가.’ 이런 제하의 칼럼에서처럼 어떤 벽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난다면 ‘비극적’이다. 당나라 조기유학생인 고운 최치원도 유사한 케이스인데, 그는 1200년 전 대륙에 날개를 펴려 한 골드 칼라의 선봉이면서 우리 나라에 한문학을 연 대학자이다. 4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 10살 때 사서삼경을 독파했으나 아무리 영특해도 명문 귀족이 아니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는 부친의 안쓰러움을 뒤로 하고 떠난 때가 12살이었고, 18살에 빈공과에 합격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변의 개인비서로 전쟁터를 전전하며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썼다. 반란군 괴수 황소를 놀라게 해 침대에서 떨어뜨렸다는 이 격문은 그를 대번에 명문장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일찍이 이규보는 ‘당서’ 열전에 최치원이 왜 빠졌느냐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통념과는 달리 최치원이 보다 걸맞은 대우를 받은 것은 오히려 귀국 후 신라에서다. 일껏 무시하다 밖에서 성공해서 돌아오면 환대하는 지금의 인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무튼 최치원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리고 아찬이 되지만, 왕실과 민중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불교 사상이었던 터라 6두품 인텔리가 학습한 유교는 대중적 설득력이 없었다. 말년의 가야산 은거는 이런 시대적 한계로 이해된다. 역으로 그가 끝까지 골품제 사회에 흡수되지 못했던들 견훤에게 간 최승우, 왕건에게로 간 최언위처럼 새로운 힘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을 가정할 수도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행사가 중국 양쩌우(揚州)에서 열렸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또, 난징(南京) 율수현엔 까마득한 옛날 유학생 최치원의 동상이 세워졌고, 기념탑과 ‘최치원 박물관’ 건립도 진행 중이라 한다.
누구보다 인생의 피로감을 잘 아는 천재시인이요, 탁월한 개혁가에게 ‘개혁 피로감’에 찌든 우리도 뭔가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글머리에 김부식의 얘기를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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