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으나 여자의 호기심은 무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판도라가 상자 뚜껑을 열자마자 검은 연기와 재난과 슬픔의 씨앗들이 세상에 두루 퍼졌다. 겁에 질린 판도라가 서둘러 뚜껑을 덮었다. 상자 안에는 미처 못 빠져나간 ‘희망’만이 남은 뒤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몇몇 이설이 있긴 하다. 이 상자는 오히려 축복의 선물이라는 것, 상자를 열고부터 희망만이 남고 행복의 씨앗들은 멀리 날아갔다. 또 다른 설은, 판도라가 기겁하여 상자 뚜껑을 닫는 순간, 속에서 “나도 풀어 달라”고 애원해서 열어주자 마지막 ‘희망’마저 영영 날아갔다는 얘기다.
어느 편을 믿든 이래저래 이 해프닝성(性) 신화가 자주 돌이켜진다. 워낙 어처구니없는 우발적 사건, 태산을 쩌렁쩌렁 울리게 해놓고 쥐새끼 한 마리인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같은 일들이 허다하기 때문일까?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가 ‘작곡’한 피아노곡 ‘4분 33초’도 말 그대로 해프닝이었다. 이 곡을 우드스톡 음악제에서 데이비드 튜터가 ‘연주’했을 때 청중들은 경악했다. 4분 33초 동안 각 악장의 시작과 끝에 피아노 뚜껑을 여닫을 뿐 건반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던 것이다.
음악사가들은 이 해프닝을 역발상의 선구적 사례라며 치켜세운다. 예술용어로서의 ‘해프닝’은 예기치 않은 듯하면서 이상하게 느끼도록 처리하는 기법인데, A. 카프로의 독주회 ‘여섯 파트로 된 열여덟의 해프닝’은 이후 이러한 유파를 나타내는 분기점이었다.
역사를 보아도 그런 것이, 언뜻 보면 승자나 다수의 기록 또는 전리품처럼 보이지만 뒤집으면 부스럼, 골, 주름투성이의 해프닝이다. 백지영의 원치 않는 노출도, 홍석천의 의도된 동성애 커밍아웃도, 과거 신군부 시절 평화의 댐 소동도 해프닝이었고, 그 출발은 센세이션이었던 게 보통이다.
탄저군을 둘러싼 해프닝이 한창일 때 포장된 우편물을 판도라의 상자만큼이나 개봉하기 겁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국내 한 경찰관은 맨정신으론 도저히 안 되겠던지 술에 취한 다음에야 국립보건원에 ‘백색가루’ 가검물을 싸들고 찾아갔다고 한다.
재미로 치면 판에 박힌 진지함보다는 가벼운 해프닝이 더 낫다. 전 같으면 필름 아깝다고 혼쭐날 출연자의 불량감자 같은 NG가 인기를 독차지한다. 하도 인기가 있다니 일부러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의외성에 환호하는 대중을 겨냥한 것이다. 차라리 치정 같은 정치, 경제성 없는 경제, 반사회적인 사회, 비문화의 문화 등 제반 병리가 한바탕 해프닝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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