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권유하는 곳, 상담하는 곳, 또는 “전 죽음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경험담을 읽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인터넷을 ‘정보의 쓰레기’라고 혹평한 중국 주석을 이해할 것 같았다.
낮에 마침 동료들과 마약처럼 사랑처럼 사람을 중독시키는 노래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를 얘기하다 만 터라 더욱 찜찜하다. 1935년 헝가리에서 레코드로 발매된 지 8주만에 187명이 자살했고, 작곡가인 래조 세레스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며 자살했다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노래, 또 노래만큼 슬픈 사랑의 선율을 담고 있다는 독약 같은 영화.
한때는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를 읊으며 현해탄에 몸을 던진 비장조의 사연이 한국 인텔리들을 유혹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모방하여 권총 자살이 유행하기도 했고 학창시절 탐독했던, 어떻게 보면 자살 소개업 같은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있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죽음의 씨를 잉태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판은 죄악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분신 자살처럼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사례도 있고,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같이 아주 드물게 역사에 길이 남은 자살도 있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죽음을 통하여 얻어질 리가 없다.
눈을 깜빡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는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류시화의 ‘자살’ 전문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참 인격이 구현된다고 한다. 자살은 죽음의 본 모습도 아무 것도 아닌, 자신에 대한 살인행위다. ‘자살이란 말을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 정말이다.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죽을 용기가 있거든 그 용기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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