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외로우면 못 사는 법이다. 개인적으로 심산유곡에서 ‘도’ 닦던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외로움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믿었었다. 액면 그대로다. 최소한 나는 나의 글에서 거짓을 말하느니 항상 글의 극적 효과와 완성도를 포기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일념이다.
네덜란드에선 ‘외로움’ 논쟁이 뜨거웠다.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에 “공허함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삭막하다.”며 안락사를 바라는 노인이 있었고, 뜻대로 이루어졌다. 외로워서 못 산 것이다.
노인의 안락사를 도운 의사는 법정에 서 있다. 그 나라는 안락사를 합법화했고, 그 나라 보건장관이 육신의 질병 없이도 삶에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용인하자 해서 파문이 일었다.
미장원에 갔다가 들춰 본 어느 여성지에도 안락사를 호소하는 안쓰러운 사연이 실렸다. 민머리에 모자를 꾹 눌렀지만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딱 6년 전에 ‘아직도 본처하고만 사십니까’라는 그 주인공의 칼럼집을 누군가로부터 선물삼아 받은 일이 있다. 압축하고 또 해서 그의 글들은 창의성과 거침없음이 절절이 우러난다.
1950년 대전 출신으로 시인이자 칼럼니스트인 이호광 씨. 그를 지칭하는 말에 말기암 환자가 추가됐다. 하루하루를 그저 그렇게 죽는 연습을 하며 산다. 그 연습에 지쳤던지 죽여달라고, 모든 이들에게 예전 모습으로 남겠다며 애원하고 있다. 부인은 길이 아니라며 끝까지 곁을 지키겠다고 단호히 앞을 가로막는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죽음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라는 칼럼에서 죽음만이 최후의 선택이라는 사람은 필경 바보이거나, 겁쟁이이거나, 차라리 죽어 마땅한 삶의 배신자라던 그가, 회생불능의 인간에게 항암제를 투여하는 것도 생명경시라며, 말하자면 국내에서도 논란이 일다가 임시 봉합된 사안인 ‘소극적 안락사’를 온 몸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현대 의학이 포기한 이호광 씨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한다. 죽음보다 더 슬픈 건 잊혀지는 거라는데, 죽음보다 더 아픈 건 지워지는 거라는데―링거를 팔에 꽂은 채 세상에 마지막 흔적으로 남길 시집 한 권을 엄숙히 준비하는 그에게 안타깝지만 아름다웠노라고, 힘내라고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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