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라. 그들이 스탈린의 그악스런 압제에 옹호 내지 우호의 제스처를 보내는 동안, 스탈린은 수많은 자기 동포를 학살하고 괴롭혔다. 그것은 왜 들추지 않았을까? "
이미 저질러진 잔혹성 앞에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런 유(類)의 지성에 대한 회의감을 멀리하고, 특히나 히틀러가 왜 그렇게 ‘나쁜 인간’이 되었는가, 왜 유태인과 여자를 죽도록 싫어했나를 살펴보는 것도 무익하진 않을 것이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행상인이었다. 어머니는 고독과 가난을 못 견뎌 돈 많은 이웃 유태인과 불륜을 맺었다. 어린 히틀러가 눈물로 호소도 해 보았지만 끝내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그 비극의 씨앗이다. 히틀러의 여자와 유태인에 대한 증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결국 그는 6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함으로써 천추만고에 씻지 못할 과오를 저질렀다. 비약하자면 한 어머니의 타락이 인류를 비극에 빠뜨린 것이다.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 오십 중반인 적군파 최고간부를 우린 아직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세계 혁명을 꿈꾸는 미모의 테러리스트로 기억한다. 확실히 부르주아 타도를 외치는 그녀의 인상은 강렬했다. 그 ‘적군파’의 딸 시게노부 메이(重信命)가 시선을 끌었다.
메이는 후사코가 레바논에서 활동하던 시절, 무명의 팔레스타인 전사 사이에서 얻은 사랑의 결실이다. 생명의 위협 때문에 커다란 가방 속에 숨겨 다니며 난민촌에서 자라난 딸이 어머니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 혁명을 버리고 딸을 택한 후사코, 그 모성(母性)에의 회귀가 꼭 동구권 붕괴와 좌절된 현대 좌익의 이상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억압받는 인민의 언어는 ‘총’이라고 믿은 이 붉은 테러리스트가 옥중에서 ‘사과나무 밑에서 너를 낳으려 결심했다’는 수기를 냈다. 그녀는,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가볍게 뒤집는다. 여자로서도 더없이 강골이던 그녀가 이념보다 거룩한 모성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딸 메이는 외교무대에서 평화의 ‘사과나무’ 심기를 원하고 있다.
모성은 이처럼 위대한 것이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잡혀 죽을 처지가 되었을 때도 그 어머니는 가장 고귀한 것을 바치겠다며 애원해 어린 아들을 살려냈다. 이 성주 저 성주에게 팔려 다니는 신세였지만 모성만은 고결했다. 가장 값진 것이란 황금이나 육체가 아니라 눈물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나이가 들지 않는다는 일본 속담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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