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어떤 이는 빨강을, 어떤 이는 하양을 연상한다. 아니면 우울한 파랑(블루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색채는 눈에만이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신부의 흰 옷은 순결과 처녀성의 상징일 거라고 믿는다. ‘예순한 번째’ 결혼한 신부가 흰 옷을 입는데도 그렇다. 색깔은 기분, 생각과 행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쳐, 어떤 계기에는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고 또 ‘회색빛 우수’에 잠기기도 한다. 내 경험을 들라면 ‘아열대 빛으로 웃는 당신’이라는 호텔 선전문구에 홀린 기억을 말하겠다.
주말에 신경숙의 ‘바이올렛’을 다시 읽다가 몇 번이고 선잠이 들고는 했다.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 잠이 오는 책은 내게는 양서다. 잠을 부르는 색이 보랏빛이다. 한의사 김홍경이던가, 조명을 어둡게 하고 보라색을 연상하면 족소양담경락이 따뜻해지며 잠이 온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백화점 앞을 지날 때면 지하철 공사로 더뎌진 구간에서 노란 국화의 그윽하게 안기는 느낌 때문인지 여유를 찾게 된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백화점 벽에 시계가 없는 것, 매장에서 창문이 보이지 않은 것, 빠른 음악이 구매욕구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지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떤 색깔이 고객들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연구한다.
그러면 왜 빨강인가. 빨강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의미가 붙여진 것은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부터였다. ‘붉은 광장’은 이념에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라 해서 붙여졌다. 러시아어의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붉다’에서 나왔다. 선거철만 되면 걸핏하면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 놓기 일쑤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현명하다. 이제 그 따위 수작은 더 이상 약발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
어느 봄날 나뭇잎 하나가 움터 녹색으로 됐다가, 노래졌다가, 빨개졌다가, 자주색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는 밤하늘 아래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춤추려고 나무에서 떨어진다. 이렇듯 모든 색깔은 조금쯤 양면성을 지니므로 편견은 해악이다. 빨강만 하더라도 사탄이면서 신의 구원이나 순교의 색이기도 하다.
특별히 우리는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도 안 물어가는 냉전 시대의 빨갱이 논쟁은 신물난다. 정치권 모두의 색깔이야말로 변해야 할 시점이다.
변절은 나쁘지만 변화는 아름답다. 독야청청하는 상록수보다 색색이 옷을 갈아입는 나뭇잎이, 그 가운데 봄꽃보다 선연히 붉은 단풍이 나는 좋다.
당신은 빨갱이인가, 파랭이인가. 아니면 회색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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