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마구 나부끼는 작은 깃발들, 일렁이는 흰 파도 같은 전북 장수 계남면 장안산의 능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갈대의 긴 행렬도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흔히 ‘억새산’으로 불리는 강원 정선의 민둥산은 허릿매 고운 산 전체가 억새 천지로 찾는 이들은 마구 가슴이 설렌다. 바다낚시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인천 옹진의 덕적도는 자갈밭 해수욕장과 접한 갈대 군락이 서럽도록 아름답다.
이번에 새로이 각광받는 서천 한산의 신성리 갈대 군락지.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 경쟁부문에 출품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부닥치던 이곳도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지뢰를 밟은 남한군(이병헌)이 북한군(송강호)에게 “가까이 오지 말랬지 언제 그냥 가랬어? 살려 주세요!” 하고 외치던 갈대숲 지뢰밭에는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눈밭에서 서로 총을 맞겨눈 채 담배를 나눠 피우는 장면, “내 꿈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것”이라는 북한군의 미제 타령은 오히려 때묻지 않은 휴머니즘으로 다가왔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 웃음의 공감대는 통일 독일의 베를린 현지의 영화제에서도 확인됐다. 한반도 분단 상황을 그린 이 영화는 복사본이 평양에 반입돼 김정일이 감상했다 해서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인민군의 딸 출신으로 죽음에 얽힌 의문을 파헤치는 중립국 수사관 역의 이영애, 북한군 역의 송강호는 실제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명예조사관이 되는 등 그 뒷자락도 만만하지 않다. 서울 252만명, 전국 590만명이라는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과 함께 이 영화는 한민족 분단의 슬픈 기념물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 속, 어둠 속에서 하얗게 일렁이던 신성리 갈대밭에도 아산의 판문점 세트와 함께 많은 관광객과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면 한다. 갈꽃 사이를 거닐며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했던 햄릿의 음유시인 같은 독백이라도 읊조리는 연인들이라면 금상첨화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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