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이면 괴테가 샬로테 본 스타인에게 바친 것처럼 진한 그리움으로 꽉 채워진 사람들을 본다. 그게 사랑이고 살아 있음이다.
―내 주위는 당신의 영혼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어떤 물체도 보이지 않아요. 설령 무엇인가가 잠깐 눈에 들어오더라도 결국엔 로테, 로테, 로테, 로테, 로테, 로테…… 당신 모습만이 보일 뿐.
손으로 그린 것이 그림이라면, 그리움은 마음 붓으로 그린 그림이다. 여지껏 문학소녀인지는 알 바 없지만 이맘때쯤 어느 소녀한테서 받은 좀 쑥스런 연애편지를 공개해야겠다. 기억엔 가물거리지만 심히 표절의 냄새를 풍기는 그 편지를 원형에 가깝게 재구성하면 이렇다.
“그 사람이 그리워하는 사람까지가 그 사람입니다. 그대여, 내가 쳐다보는 저 별을, 저 달을 그대도 보고 계시면 곧 그대가 날 쳐다보시는 겁니다.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이 곧 나(我)니까요. 내가 보고 싶을 땐 이 글을 보셔요. 나 또한 그대를 그려 볼게요.”
애초에 그리움을 제대로 모르면 화가나 문인 될 자격이 없다. 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저물녘 울부짖는 소나 달과 까마귀 그림에 실었던 이중섭! 그리움에 겨워 풀썩 쓰러지는 김소월은 또 어떠했는가.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초혼’은 처절하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류시화도 그리움에 관한 한 일가(一家)를 이룬다.
그리움이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거다. 금을 긋거나(劃) 그림을 그리고(畵) 글을 쓰는 일(書).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慕)은 뿌리가 같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며 사랑의 진실을 믿는 남자,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속성상 변하는 것임을 이미 아는 연상의 여자. 가을날 본 수상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선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반세기를 넘긴 이산가족의 그리움은 살점이 찢기는 아픔이다. 그걸 연기하다니, 그리움을 모르는 자들의 소행 아닌가. 테러도 전쟁도 이와 한가지다. 세상이 뻑뻑하니 신문도 공무원도 시민도 매말랐다. 그 윤활유가 그리움이요, 그리움이란 우리들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 끝끝내 쫓겨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낙원이었음에라.
누군가를 그리고 싶은 것, 누군가가 내 마음에 금을 그려 놓은 것.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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