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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3-2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정재수라는 아홉 살 난, 소년이라기엔 너무 어린 소년이 있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큰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가 고갯길의 눈더미 위에 쓰러지자 옷을 벗어 아버지의 몸을 녹이려다 함께 얼어붙어 숨진 어리디어린 천사였다.


이 눈물겨운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반짝 실렸다가 사라졌고, 그가 2학년을 다녔던 경북 상주 사산초등학교는 폐교되고 없지만, 그 뜨거운 선행은 아직도 가슴속에 살아 있다.


워싱턴에서 비행기 사고가 있었을 때 헬리콥터에서 내려뜨린 구명밧줄을 두 번씩이나 남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싸늘한 포토맥 강심(江心)으로 빠져들어간 의인(義人)이 생각난다. 그 초로 신사의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위대한 정신만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의인을 말할 때 절대 빠뜨리지 않아야 할 막시밀리안 콜베. 폴란드 출신인 이 가톨릭 신부도 나치스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신세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도망자 한 명이 생긴 이튿날 무작위로 뽑힌 열 명이 아사(餓死) 감방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자기 아내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사나이를 보았다. 신부는 폴란드 하사관인 그를 대신하여 끌려가기를 자청, 열엿새를 굶은 끝에 독약 주사를 맞고 숭고한 생애를 마쳤다. 살아난 하사관 가조우니첵크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런 말을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전 신부님께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못했습니다.”


4・19혁명 당시 서울대 수학과 3학년생이었던 김치호의 죽음은 4・19정신만큼이나 거룩하고 거룩하다.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수혈할 차례가 왔지만 잇따라 실려온 부상자에게 양보를 거듭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저 학생부터……”는 지상의 어떤 명설교자의 설교, 고승의 법어보다 힘이 있다.


불길 속에서 제자와 목숨을 맞바꾼 선생님. 물에 빠진 어린이들을 다 구해 놓고 급류 속으로 휩쓸려 간 학생. 이들의 희생은 우리 사회를 이만큼이나마 덜 썩도록 유지시키는 소금이다.


일본인을 구하려다 낯선 땅 지하철역에 자신을 던진 한국 유학생 이수현의 죽음은 아름답다. 일본 총리가 고개를 숙였다고 우쭐해하지만 말고 그의 고귀한 사랑 앞에 모두 고개 숙여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콜베 신부를 성인품(聖人品)에 올리면서 되풀이한 구절은 종교를 떠나 모두가 음미해 봄직하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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