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을 일깨우게 해준 그의 사상이 배어든 금강물이 유유하고, 가난과 씨름하던 동남리 생가가 남은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이다. 그가 아니었던들 백제는, 그리고 부여는 한층 쓸쓸할 것 아닌가.
이 오층석탑의 풀밭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다. 방학을 맞아 내려온 시인은 파란 생풀을 뜯어 두 갈래로 여대생 인병선의 머리를 묶어 주었다. 시골 어른들이 풀어헤친 머리를 싫어해서였다는데, 아름답다.
24년 전 부인 인병선이 회상하며 쓴 싯누렇게 변한 글이 여태 남아 있다. 몇 트럭분의 폐지가 되어 H제지에 실려갔지만 유물처럼 간댕간댕 명이 붙어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스물두 살 여대생인 나는 아직 그런 시골을 본 일이 없다. 차가 논산 시내를 터덜거리는 자갈길로 돌아서자 길가 혹은 풀조차 메마른 뻘건 황토 언덕 밑에 낡은 초가집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또 그가 죽고 나서야 그 복잡한 아내의 자리에서 티 없는 독자, 추종자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위정자들은 ‘껍데기는 가라’에 알러지 반응을 보인 나머지 새기지 못하게 했다 한다. 대신, 백제교 곁 강변에는 ‘산에 언덕에’ 시비가 호젓이 서 있다. 바로 지척인 생가에 못 들러 시인에게 큰 결례를 한 것 같다. 고란사 앞 은행잎이 다 지기 전에 찬찬히 다녀와야겠다.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부소산은 선친과의 마지막 여행지다.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만년에 석탑이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리라는 생각을 하며 빗길을 되짚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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