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층석탑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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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석탑과의 만남

  • 승인 2004-03-2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부여에 가면 신동엽 시인의 부인 인병선과의 러브 스토리가 얽힌 정림사지에 꼭 들른다. 주말에 행사차 갔다가 아주 뜻하지 않게 또 가게 됐다. 용케도 행사장 근처에서 재현된 백제대왕 행차를 무심코 따라가보니 정림사지 오층석탑이었다. 패망한 고도에서 달려드는 허허로움이 무한정 좋아 내 글에도 등장했을 만큼 소회가 유다른 곳이다.


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을 일깨우게 해준 그의 사상이 배어든 금강물이 유유하고, 가난과 씨름하던 동남리 생가가 남은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이다. 그가 아니었던들 백제는, 그리고 부여는 한층 쓸쓸할 것 아닌가.


이 오층석탑의 풀밭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다. 방학을 맞아 내려온 시인은 파란 생풀을 뜯어 두 갈래로 여대생 인병선의 머리를 묶어 주었다. 시골 어른들이 풀어헤친 머리를 싫어해서였다는데, 아름답다.


24년 전 부인 인병선이 회상하며 쓴 싯누렇게 변한 글이 여태 남아 있다. 몇 트럭분의 폐지가 되어 H제지에 실려갔지만 유물처럼 간댕간댕 명이 붙어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스물두 살 여대생인 나는 아직 그런 시골을 본 일이 없다. 차가 논산 시내를 터덜거리는 자갈길로 돌아서자 길가 혹은 풀조차 메마른 뻘건 황토 언덕 밑에 낡은 초가집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또 그가 죽고 나서야 그 복잡한 아내의 자리에서 티 없는 독자, 추종자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위정자들은 ‘껍데기는 가라’에 알러지 반응을 보인 나머지 새기지 못하게 했다 한다. 대신, 백제교 곁 강변에는 ‘산에 언덕에’ 시비가 호젓이 서 있다. 바로 지척인 생가에 못 들러 시인에게 큰 결례를 한 것 같다. 고란사 앞 은행잎이 다 지기 전에 찬찬히 다녀와야겠다.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부소산은 선친과의 마지막 여행지다.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만년에 석탑이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리라는 생각을 하며 빗길을 되짚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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