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기디질긴 옷은 농민이나 노동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급기야 전세계로 확산돼 남녀노소나 사철이 따로 없는 평상복이며 레저복으로 자리매김했다.
청바지에 펑크를 내거나 찢어서 속살을 드러내 가난한 거지 흉내를 일삼는 최근의 경향은 초기 정신으로 회귀하려는 잠재적 반동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청바지는 자본주의적 근로와 검약의 상징이기도 하다. 백악관에서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로 염문을 뿌린 클린턴도 이 옷을 즐겨 입었다. 새 주인이 된 부시는 백악관에서 청바지를 금지함으로써 어떤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도 나중에는 입었지만,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다르다는 의사 표시이자 클린턴 스타일에서 확연히 벗어나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성경과 연장, 그리고 청바지. 아산, 진주, 경산, 파주, 태백, 군산 등지에서 사랑의 하모니를 연주한 카터의 소지품이다. 아산 도고에 수석자원봉사자 자격으로 나타난 카터의 흰 셔츠에 빛 바랜 청바지는 산뜻하고 군더더기 없는 패션이었다.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JCWP) 현장에 나선 그는 어느덧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지만 깨끗한 노인으로 보였다. 한때 그가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해서 실리는 비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해마다 카터는 각국을 돌며 무주택자들의 집을 짓는 프로젝트를 벌여 왔다. 부인과 함께 익숙한 솜씨로 합판을 자르는 소리, 서로 말귀도 통하지 않는 2000여 자원봉사자들의 힘찬 망치질 소리, 그것은 평화를 박는 우렁찬 합창이었다. 이들이 집을 짓느라 오고간 아산의 군도 23호선은 ‘지미 카터로(路)’로 명명됐다.
꼬박 한 달의 최장기 휴가 계획으로 미국민의 눈치나 보는 부시보다는 카터가 힘있어 뵌다. 아마도 도덕적인 힘일 것이다. 현직 시절, 그는 자신이 땅콩 농사를 짓던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휴가를 곧잘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나를 더욱 감동시킨 건 쌈질만 잘하는 줄 알았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그리고 소년원 학생과 교사, 자전거 국토 종단을 마친 대학생들이 현장에 합류해 봉사를 통해 사랑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좀전에 요요마의 첼로 연주를 들었지만, 진실로 고운 소리는 따로 있음을 알게 됐다.
아름답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지 가수 안치환에게 물어 봐야겠다. 카터의 물 빠진 청바지, 한 마디로 멋졌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카터만은 상 때문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상을 받기 전후해 마음고생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참, 우리집 딸아이도 카터 얘기를 써서 외교통상부에서 주는 상을 탄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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