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사회의 전형은 조지 오웰의 '1984년'에 앞서 파놉티콘에 있다. 모두(판) 본다(옵티콘)는 뜻을 가진 원형감옥 파놉티콘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덤이 창안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도덕과 입법의 기초"라고 설파한 바로 그다.
이런 것이다. 가운데 원형공간에 감시탑을, 바깥쪽엔 죄수 방을 만든다. 죄수 방은 밝고 감시탑은 어두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 죄수들은 규율의 내면화로 자기가 자기를 감시한다는 발상이다.
다시 파놉티콘을 현대 철학 용어로 만든 이는 미셸 푸코다. 효율과 편의성의 이름 아래, 규율사회를 뜻하는 파놉티시즘이 구석구석에 틈입한다고 본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기세 좋은 전자정부 구현 시도는 파놉티콘 못지않게 역파놉티콘, 곧 역감시의 가능성마저 내포한다. 개인 정보가 개인을 지배하는 현상인 이른바 데이터베일런스(Dataveillance)의 위험도 있다.
나에 관한 정보가 모조리 정부의 서버에 입력되는 상황에서 '1984년'이나 '파놉티콘'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외국의 프라이버시 옹호 단체들이 전자주민카드 사업을 대형(빅 브라더)의 출현에 빗댄 엄살이 이해된다.
상상 속의 개념이 아니다. 은행, 백화점, 빌딩, 어딜 가도 마찬가지고 술집에도, 러브호텔에 가도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 바늘구멍만한 핀홀 렌즈가 달려 성냥갑만한 카메라, 드레스셔츠 단추 크기의 도청기도 나왔다. 집전화나 CDMA 휴대폰도 못 믿겠고 불륜에는 007작전이 필수다. 일상 속에 편재(遍在)된 일련의 감시 체계가 다름아닌 파놉티콘이다.
한 마디로 정보의 바다에 휩쓸려 개인은 실종된다. 우리가 스스로 구축한 정보감옥에서 프라이버시는 죽고 파시즘은 살아났다. '나'라는 정체성은 없고 현시욕만 있다.
"행복 실현을 저해하는 행태는 가차없이 응징해야 한다"는 저 공리주의자의 말이 사무치고 '선거 파파라치'가 되겠다는 시민단체측의 말도 오늘따라 목에 걸린다. 정치권의 도청 시비도 지긋지긋하다.
여기에 파라라치, 카파라치, 팜파라치라는 굴절된 파놉티콘까지 작동하고 있다. 화장실조차 사적인 공간이 못 된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빅 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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