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낡은 노트로 남겨두었던들, 눅눅한 지하실이나 광의 누렇게 변색된 책들과 식용유 냄새 감도는 잡지 나부랭이 속에 처박아두었던들 하고 자책해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시간과 돈을 들이면 복원하는 방법은 있다.
문득 잊고 지내던 옛날 물건들을 대하면 하동 쌍계사 불타버린 적묵당에 있던 이중구들장에나 누워 있는 듯이 온 몸이 고루 따스해진다. 분당 33과3분의1 바퀴 도는 LP판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나는 LP판의 영속을 믿었다. 그러나 헛된 믿음이었다. 아날로그 시대는 다시 오지 않지만 그 융통성이 그립다.
레코드판은 CD와는 달리 어디 좀 긁혀서 음이 튈지라도 손가락으로 슬몃 밀면 장애물 경주하듯 콩닥닥 다음으로 넘어가는 잔재주가 참으로 정겨운 것이었다. 긁힌 한 곡을 뺀 다른 곡들이 덩덩그렇게 돌무덤의 예수처럼 부활하면 보퉁이 빠뜨리고 목숨은 건진 심정이곤 했다.
아쉽지만 그렇게 패티김을 듣고 비틀스를 들었다. 어쩌다 레코드판이 말을 잘 안 들을라치면 거죽면에 물을 뿜는다든지 유리 사이에 판을 끼워 볕바른녘에 두면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에 비해 디지털은 몰인정할뿐더러 너무 빨라 멀미와 어지럼증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불연속성과 쌍방향성이 생명인 디지털은 아주 묘한 마력을 지녔다. 문화 수용자를 동시에 생산자로 만드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실체와 이미지, 자연과 문명의 차이 만큼이나 확연한 마인드의 변화를 요한다.
분당 250장을 식별하는 전자개표기도 우리의 단방향 사고에 여지없이 똥침을 놓는다. 백열등 아래서 다발다발 묶인 투표용지를 침 퉤퉤 뱉아가며 세던 방식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다. 그 정확도는 지난 총선 때 단 한 표의 오차가 없던 것으로 판명됐다.
인터넷에 올린 괴담 수준의 글로 촉발돼 지금까지 질질 끌고 온 개표 조작 시비 자체가 난센스다. 당선자는 물론 아름다운 승복으로 가슴을 찡하게 한 낙선 후보 모두에게 흠집을 내는 일이다. 당력을 모으기 위한 대외용 이슈라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깨어나 웃는다.
멧돼지와 집돼지를 교배해 태어난 새끼 돼지를 하이브리드(hybrid)라 불렀다. 하이브리드란 '잡종'이나 '튀기'라는 뜻올 '퓨전'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여러 모델의 특징을 뒤섞어 놓은 자동차를 하이브리드카라 한다.
암말과 수탕나귀를 교배해 나온 하이브리드인 노새는 말같이 힘세고 당나귀같이 끈질기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노무현 대통령은 하이브리드 같다. 하이브리드인 그가 디지털 시대에 맞는 대통령이 될지는 두고두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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