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엘리베이터에 씌인 문구인데 오랜만에 공감하는 문구다. 사실 나는 스무살 이후로 잠언을 잘 믿지 않았다. 한때는 이른바 '사상집'에 심취해 외다시피 읽었어도 직접 체험해 보니 상당수가 죽은 말들이거나 교언영색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한가해지면 '명언 뒤집기' 또는 '명언 거꾸로 읽기' 따위의 책을 한 권 쓰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책들도 많다. 그렇지 않은 글들도 많다. 나의 경우, 연암 박지원이 그렇다. 오뉴월에 도포 입고 먹을 갈아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생각하면 춥네 덥네 하는 날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워드 작업을 하는 손가락 사이에 땀이 밸 정도로 덥다.
이 기행문집은 규장각도서와 충남대학교 도서관 고서실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정조 때 연암이 그의 종형을 따라 청 고종의 칠순연에 다녀오는 길에 랴오둥, 산하이관, 베이징 등지의 문물을 돌아보며 견문을 낱낱이 적은 기록이다. 발로 쓴 글이란 이런 것이리라. 열하일기를 다시 뒤적이며 '보도자료' 한 장 없이 쓴 연암의 부지런함과 통찰력에 경의를 표한다.
당대 보수파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된 이 글들은 경치나 풍물에 대한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신문물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실학자다운 면모가 한층 돋보인다. 볼수록 관찰은 세세하고 표현은 유려하다. 어느 날, 물새떼가 모래 위에 늘어 앉아 깃을 씻고 있었다. 배에서 이른 본 사람들이 "강산이 그림 같으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연암은 의미심장한 말로 응대한다.
"그대들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구려. 어디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지. 비슷한 것으로써 비슷한 것을 비유함은 실은 같은 것 같을 성싶어도 같은 것이 아닌 거요."
강산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강산.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소강(小康) 수준'에 도달한 중국은 놀라운 토끼 행보로 우리 수출 주력시장을 목전에서 위협한다. 중국이 우리를 벤치마킹한다고 야단이더니 어느 결에 전경련 임원으로 구성된 이른바 신사유람단을 보내 그들을 이미테이션한다고 법석인 것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새 대통령에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주문하면서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창출하지 못하면 향후 5년내 중국에 밀린다는 우려감을 표시했다.
왜 많은 외국기업들이 한국을 피해 중국으로 몰리는지, 강소국(强小國) 한국의 생존전략은 무엇인지 헤아리고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오."라고 한 연암의 정신을 음미했으면 한다. 필자의 필법도 연암을 닮아야 하겠다는 과욕에 잠시 피로를 잊는다.
아까 그 엘리베이터의 문구는 이렇게 끝난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교제에 싫증이 나면 서재에 들어가 죽은 사람을 방문하라. 고인은 그들과 교제하고 대화 가운데 교만한 빛을 띠지 아니하고 사욕을 부리지 아니한다." 싫증낼 애인이 없다, 친구도 없다 탓하지 말고 책 한 권 속에서 마음속의 연인, 마음속의 친구를 구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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