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를 읽으며

  • 오피니언
  • 문화칼럼

열하일기를 읽으며

  • 승인 2004-03-2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책은 소년을 유혹하고 노년을 즐겁게 하며 무료함을 달래며 모든 번뇌를 잊게 하며 걱정과 정욕을 누그러뜨리고…… 용기를 준다."

회사 엘리베이터에 씌인 문구인데 오랜만에 공감하는 문구다. 사실 나는 스무살 이후로 잠언을 잘 믿지 않았다. 한때는 이른바 '사상집'에 심취해 외다시피 읽었어도 직접 체험해 보니 상당수가 죽은 말들이거나 교언영색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한가해지면 '명언 뒤집기' 또는 '명언 거꾸로 읽기' 따위의 책을 한 권 쓰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책들도 많다. 그렇지 않은 글들도 많다. 나의 경우, 연암 박지원이 그렇다. 오뉴월에 도포 입고 먹을 갈아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생각하면 춥네 덥네 하는 날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워드 작업을 하는 손가락 사이에 땀이 밸 정도로 덥다.

이 기행문집은 규장각도서와 충남대학교 도서관 고서실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정조 때 연암이 그의 종형을 따라 청 고종의 칠순연에 다녀오는 길에 랴오둥, 산하이관, 베이징 등지의 문물을 돌아보며 견문을 낱낱이 적은 기록이다. 발로 쓴 글이란 이런 것이리라. 열하일기를 다시 뒤적이며 '보도자료' 한 장 없이 쓴 연암의 부지런함과 통찰력에 경의를 표한다.

당대 보수파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된 이 글들은 경치나 풍물에 대한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신문물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실학자다운 면모가 한층 돋보인다. 볼수록 관찰은 세세하고 표현은 유려하다. 어느 날, 물새떼가 모래 위에 늘어 앉아 깃을 씻고 있었다. 배에서 이른 본 사람들이 "강산이 그림 같으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연암은 의미심장한 말로 응대한다.

"그대들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구려. 어디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지. 비슷한 것으로써 비슷한 것을 비유함은 실은 같은 것 같을 성싶어도 같은 것이 아닌 거요."

강산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강산.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소강(小康) 수준'에 도달한 중국은 놀라운 토끼 행보로 우리 수출 주력시장을 목전에서 위협한다. 중국이 우리를 벤치마킹한다고 야단이더니 어느 결에 전경련 임원으로 구성된 이른바 신사유람단을 보내 그들을 이미테이션한다고 법석인 것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새 대통령에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주문하면서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창출하지 못하면 향후 5년내 중국에 밀린다는 우려감을 표시했다.

왜 많은 외국기업들이 한국을 피해 중국으로 몰리는지, 강소국(强小國) 한국의 생존전략은 무엇인지 헤아리고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오."라고 한 연암의 정신을 음미했으면 한다. 필자의 필법도 연암을 닮아야 하겠다는 과욕에 잠시 피로를 잊는다.
아까 그 엘리베이터의 문구는 이렇게 끝난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교제에 싫증이 나면 서재에 들어가 죽은 사람을 방문하라. 고인은 그들과 교제하고 대화 가운데 교만한 빛을 띠지 아니하고 사욕을 부리지 아니한다." 싫증낼 애인이 없다, 친구도 없다 탓하지 말고 책 한 권 속에서 마음속의 연인, 마음속의 친구를 구하면 어떨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5.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1. 생명종합사회복지관, 마을축제 '세대공감 뉴-트로 축제' 개최
  2. [화제의 인물]직원들 환갑잔치 해주는 대전아너소사이어티 117호 고윤석 (주)파인네스트 대표
  3. 대전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남대 공동학술 세미나
  4.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사랑의 오누이 & 사랑 나누기' 결연활동한 동방고 국무총리 표창
  5.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헤드라인 뉴스


`2026 세종 국제정원도시박람회` 실낱 희망도 깨졌다

'2026 세종 국제정원도시박람회' 실낱 희망도 깨졌다

2026년 세종 국제정원도시박람회 개최가 2024년 가을 문턱을 넘지 못하며 먼 미래를 다시 기약하게 됐다. 세간의 시선은 11월 22일 오후 열린 세종시의회 산업건설위원회(이하 산건위, 위원장 김재형)로 모아졌으나, 결국 더불어민주당 주도의 산건위가 기존의 '삭감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서다. 민주당은 지난 9월 추가경정예산안(14.5억여 원) 삭감이란 당론을 정한 뒤, 세종시 집행부가 개최 시기를 2026년 하반기로 미뤄 제출한 2025년 예산안(65억여 원)마저 반영할 수 없다는 판단을 분명히 내보였다. 2시간 가까운 심의와 표..

[드림인대전]생존 수영 배우다 국가대표까지… 대전체고 김도연 선수
[드림인대전]생존 수영 배우다 국가대표까지… 대전체고 김도연 선수

"생존 수영 배우러 갔다가 수영의 매력에 빠졌어요." 접영 청소년 국가대표 김도연(대전체고)선수에게 수영은 운명처럼 찾아 왔다. 친구와 함께 생존수영을 배우러 간 수영장에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했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본격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김 선수의 주 종목은 접영이다. 선수 본인은 종목보다 수영 자체가 좋았지만 수영하는 폼을 본 지도자들 모두 접영을 추천했다. 올 10월 경남에서 열린 105회 전국체전에서 김도연 선수는 여고부 접영 200m에서 금메달, 100m 은메달, 혼계영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무려 3개의..

[현장]구청·경찰 합동 쓰레기집 청소… 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현장]구청·경찰 합동 쓰레기집 청소… 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속보>="내 나름대로 노아의 방주 같아…'나는 자연인이다' 이런 식으로, 환경이 다른 사람하고 떨어져서 살고 싶어서 그런 거 같아요." 22일 오전 10시께 대전 중구 산성동에서 3층 높이 폐기물을 쌓아온 집 주인 김모(60대) 씨는 버려진 물건을 모은 이유를 묻자 이같이 대답했다. 이날 동네 주민들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쓰레기 성이 드디어 무너졌다. <중도일보 11월 13일 6면 보도> 70평(231.4㎡)에 달하는 3층 규모 주택에 쌓인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청소하는 날. 청소를 위해 중구청 환경과, 공무원노동조합, 산성동 자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