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인터넷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세계 제일의 전자개표 수준에서 보았듯이 문명의 찬란한 성과물이면서 무인지경으로 악을 조장하는 문명의 쓰레기이기도 하다. 말이 좋아 '컴퓨토피아'니 '사이버토피아'지 어느 때고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세상살이의 파고가 넘기 힘들수록 어떤 이상향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갈구한다. 일상 쓰는 말에 엑스피아월드가 그렇고, 테크노피아와 에너토피아, 아파트형 공장인 팩토피아, 미래의 꿈을 지하세계에서 찾는다는 지오토피아도 그러한 갈망의 일단이다.
책방 좀 크게 만들고는 북토피아요, 양로원 같은 걸 구상하면서 실버토피아라고 호들갑을 떤다. 이밖에 게임토피아, 홈토피아, 시네토피아 등 온통 유토피아 타령이다. 방금 받아본 잡지에는 문학과 유토피아를 합성한 '리토피아(litopia)'라는 말이 나온다. 문학으로 행복한 세상을 가꾸겠다는 의지라 한다.
심지어 투기조차도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시장에 투기꾼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경제 정의가 실현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병목현상으로 더 잦은 경제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그래서 투기는 실패한 투자, 투자는 성공한 투기라 일컬어진다.
정권이나 정부의 교체 또는 이데올로기의 종점도 마찬가지로,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나라라는 뜻 그대로다. 이 말을 만든 토머스 모어는 국왕 헨리 8세와 시녀 앙 브린의 결혼을 반대한 죄목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지금 살아난다면 이 말을 거듭 부인할 것이다.
"찍어봐야 자기네들만 잘 사는데 뭐하러 찍어요."
"그러니까 잘 찍어야죠."
중앙시장 먹자골목에서 흘려 들은 어느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대화다. 예상대로 대전·충남의 투표율은 저조했다. 전국 최저다.
물론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유토피아가 실현된다고 기대하는 국민은 없을 줄 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방명록을 쓰면서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적고는 한다. 어쨌든 그가 당선됐고 나는 그의 '사회연대'에 관심이 많다. 경제를 자유시장의 원리로 키우되 여기서 도태하는 서민들을 시장으로 되돌린다는 얘기다. 함께 잘사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다. 유토피아는 아니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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