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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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또 지나갔다

  • 승인 2004-03-0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갔다. 핵풍, 미풍, 병풍, 북풍, 노풍, 정풍, 안풍도 이제 곧 잠잠해진다. 아무리 부인하고 구실을 갖다 붙여도 선거는 그 자체가 바람이다. '선거바람'인 것이다. 이리 불었다 저리 불었다 하는데 왜 바람이 아니란 말인가.

아침 스포츠신문엔 부부인 연예인 최진실과 야구선수 조성민이 서로 바람 피웠다고 주장하는 소식이 톱으로 실렸다. 선배 집에 다니러간 조성민이 바람 피러 가는 줄 알고 순경아저씨를 데리고 간데 대해 조성민이 몹시 격분했다 한다.

이런 전대미문의 바람 판결이 있었다. 아내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글을 인터넷에 띄우자 그 상대 여성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이다. 성관계도 안 가졌는데 어찌 바람피웠다고 하느냐는 요지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어쨌든 바람피운 것이라며 '아내'의 손을 들어줬다.

국어사전까지 동원된 이 전대미문의 판결문을 다시 들여다 본다. "바람이 사전적 의미로 '이성에 마음이 끌려 들뜬 상태'를 의미하는데다, '바람을 피웠다'는 표현이 반드시 상대방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해석되기는 어렵다."

물론 법과 도덕은 다르다. 형법이 바람피운 것에 대한 심리(審理)만을 취하는데 반해 도덕률은 남녀간 모든 부정 불결한 태도까지 용납하지 않는다. 좀 거창하게는, '바람'이란 한국적 사상의 원형이며 비유적 함축이기도 한 것이다. 겉멋이 들거나 잔꾀만 부려도 '바람들었다' 한다.

아까 예를 든 판결은 오입(誤入)의 재해석에 가깝다. 오입의 본뜻은 취미생활을 두루두루 일컬었다. 선인들은 응마궁기(鷹馬弓妓)라 하여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기생놀음을 오입의 으뜸으로 꼽았다. 골프나 스키가 고전적 의미로는 오입이다.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한 피리 옆에다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물결소리

눈물 나는 시다. 생전에 바깥으로만 나돌던 미당이 평생 싫은 기색 한번 않던 아내에게 이 시를 바쳤다. 그의 '자화상'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가 'It is the wind that has raised the better part of me'로 영역된 것을 보았다. 이런 오역이 어딨는가.

바람났다, 바람맞다, 바람피우다, 바람들었다 등 바람은 뭔가 순응적 삶에서의 이탈을 말한다. '바람이란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세상일'이라던 장자의 말씀이 새삼스럽다. 여느 땐 연인의 숨결처럼 보드랍다가 때로는 인정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소나기 같지만, 그러나 생활 필수품인 바람! 그러나 바람 부는 대로 돛을 달다간 때아닌 역풍을 만날 수도 있다. 역풍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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