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씩이나 절차나 과정의 '간소화'를 표방해 기초의회 등의 존폐가 거론되지만 반드시 폐지가 바람직한가는 숙고해 볼 문제다. 사실 우리는 지나치게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이상에만 치우쳐 있지 막상 그 실행에 들어가면 한참 유리돼 있다. 도시국가(city-state)나 도시(city)로도 번역되는 폴리스(polis)를 보더라도, 한 마디로 그것은 아주 작은 국가였다.
직접민주주의의 원조인 아테네에서 민회(民會)가 열리면 50명 가운데 1명이 추첨으로 의장이 되었다. 제비뽑기로 국가원수가 탄생한 것이다. 처음 여호수아가 땅을 분할할 목적으로 사용한 이 제도는 금기를 어긴 죄인을 찾아내거나 제단에 바칠 염소를 고를 때도 썼다고 성경은 적고 있다. 이밖에 성전에서 나무를 준비할 때, 노래부르는 자나 문지기를 맡기면서도 역시 제비뽑기를 거쳤으며 초대 이스라엘의 왕도 이 방식으로 선택됐다.
지금의 남북 문제나 골치아픈 보 혁 논쟁도 그때라면 속 편히 제비뽑기로 해결했다. 그렇게 일단 결과가 가려지면 신의 뜻으로 받들어 수용한 것은 서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는 폴리스의 이상적인 인구는 자유민이 5000명쯤으로, 서로 얼굴을 아는 정도여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비교하자면 지금 시골의 작은 면(面)이나 도시의 웬만큼 큰 아파트 단지의 거주민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는 이랬다.
인구 20만을 넘는 폴리스는 겨우 손꼽아 시라큐사, 아크라가스, 아테네 정도가 고작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확장된 아테네인 아티카제국도 35만을 넘지 않았으니 천안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적당히 적은 인구가 직접민주주의와 제비뽑기의 요건인 셈이다.
오늘날처럼 많은 인구를 거느린 영토국가에서 선거나 다수결의 순리(順理)를 과신하는 건 어쩌면 필연이다. 당연히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지배가 용인되는 과두제의 철칙(R. 미헬스)이나 소수자 원리(M. 베버)로 귀결된다.
그래서 자유주의자 밀은 의견의 전제(專制), 도덕의 전제, 나아가 다수자의 전제를 위험시했을 것이다. 이것은 선거가 현행보다 훨씬 직접적인 형식을 취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일부 엘리트가 아니라 소수자, 사회적 약자, 또 지방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진짜 민주주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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