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영상]우리가 몰랐던 대전의 역사, 대전을 지켜낸 이방인들
2021-08-18 13:09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보름 만에 금강 방어선까지 밀린 국군은 임시 수도였던 대전까지 내주는 위기에 처했다. 7월 초순부터 국군을 대신해 방어전에 투입됐던 미육군 24사단은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오산-천안-조치원을 연달아 내줬고 이에 미군은 대전을 금강방어선의 최후의 보루로 삼고 34연대가 대전 갑천, 21연대가 마달령, 19연대가 영동을 축으로 연결하는 방어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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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육군 지휘관 워커중장(좌측)과 윌리엄 딘 소장(우측) 출처:6.25 한국전쟁사(국방부) |
일본에서 급하게 파견된 미군은 전열을 정비하지도 못한체 북한군의 주력 전차인 신예 T-34전차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군에는 전차를 잡는 2.36인치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85mm 강력한 주포와 강판 장갑으로 무장된 북한군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8군 워커사령관은 추가병력이 도착 할 때까지 지연전을 펼칠 것을 미24 사단에 하달한다. 대전 방어를 지휘했던 윌리엄 딘 소장은 북한군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신무기였던 3.5인치 로켓포를 일본에서 긴급후송해 부대에 배치하고 34연대로 하여금 유성-논산가도 즉 현재의 계룡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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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사용됐던 로켓포(유튜브 영상 캡처) |
7월 20일 새벽 4시경 지프를 타고 서대전 네거리를 정찰나온 미 34연대전 뷰챔프 대령은 유성 방향에서 접근하던 북한군 전차를 발견하게 되고 곧바로 전투에 들어갔다. 기관총 공격을 받은 뷰챔프 대령은 간신히 피해 사거리 한복판으로 피했고 이내 3.5인처 로켓포를 조준 포격해 전차에 명중시켰다. 기세등등하게 계룡로를 활보했던 북한군 전차는 화염에 휩싸였고 탑승한 북한군도 전원 폭사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가 미군이 대전차 무기로 북한군 전차를 잡았던 최초의 전투가 됐다.
| 한국전쟁당시 사용됐던 미군의 3.5인치 로켓포 6.25 한국전쟁사(국방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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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 챔프 대령은 사단 수색대의 로켓포 소대에 경계 강화를 지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침교 다리를 넘어오던 후비 전차도 파괴시켰다. 연달아 3대의 전차를 잃은 북한군은 후속 전차부대를 전진시켜 오후 1경 충남도청까지 진입시켰다. 이번에는 사단장 딘 소장이 소총수와 로켓포 사수들을 직접 이끌고 대전 시내를 활보하는 북한군 전차를 제압했다. 무려 1시간이나 추격한 끝에 제압에 성공한 딘 소장은 북한 전차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파괴된 전차에 기념 글귀를 새기고 인증샷까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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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대전지구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전차 미군이 최초로 잡은 북한군 전차에 글귀를 새기고 이를 기념하는 사진을 남겼다. 출처:6.25 한국전쟁사(국방부) |
그러나 딘 소장의 자신감은 훗날 자신이 전장에 고립되는 계기가 됐다. 미군과 북한군 전차가 시내에서 교전을 벌이는 사이 북한군 주력부대가 금산과 옥천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고 퇴로가 막힌 딘 소장은 철수 도중 북한군의 습격으로 홀몸으로 낙오하게 됐다. 1개월을 산속을 전전했던 딘 소장은 전남 완주 부근에서 북한군에 발견돼 포로로 잡혔다. 사단장 실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지만. 미군은 대전지구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15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파괴된 전차 중 8대가 3.5인치 대전차포에 의해 파괴됐다. 이는 곧 중화기로 북한군 전차를 타격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은 것이 됐고, 미군을 비롯해 한국군도 북한군 전차에 대한 두려움을 상상부분 떨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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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군이 야포 사격을 하고 있다. 출처:6.25 한국전쟁사(국방부) |
대전전투는 북한군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전전투 이후 1만 5천에 달했던 미 24사던 병력은 8660만이 남아 후방 영동으로 철수해 영동지구방어선을 만들었다. 대전전투는 미군에게 있어서는 큰 희생을 치는 전투였지만 이들의 결사항전 덕분에 훗날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을 펼치는데 큰 계기가 됐다. 이방인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대전!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전과 대한민국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금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