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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질 일은 터진다
"No problem." 그런데,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리야드 국립중앙병원 외래검사센터
결국, 터질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오후 근무를 시작하자, 내 책상에서 전화 벨이 울렸다. 나는 화장실을 핑계로 전화 받는 걸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오해만 커질 것 같았다. 일단 받자, 그리고 천천히 말해 달라고 해 봐야지. 혹시 저쪽에서 느릿느릿 말해 줄지 모르잖아.
"헬로우, 여기는 외래검사센터입니다."
"This is the Emergency Center.(여기는 응급센터입니다.) $#@¥※ 샬라라라라"
총알이 날아와서 내 머리를 관통한 기분이다. 응급센터까지는 알아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사랄라라라, 하며 말이 날아가 버렸다. 저 쪽에서 전화를 끊어버리자 나는 'Please!(제발)' 한마디 못하고 전화기를 덜컥 내려놓았다. 로라 아줌마가 혈액이 담긴 진공튜브에 라벨을 붙이다 나를 잠시 돌아봤다.
"Are You OK?"
"No problem.(문제없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0분 뒤, 응급실 간호사가 뛰어왔다. 외래검사센터 유리문을 열며 소리쳤다.
"응급환자라고 지원을 요청했는데 왜 안 오는 거예요. 빨리 혈액형검사하고 수혈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파미르씨 연락 안 받았어요."
파미르 아저씨가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급히 가방을 챙겨서 튀어나갔다. 갑자기 외래검사센터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듯이 싸늘해 졌다. 나는 조금 전 전화가 긴급전화였다는 걸 분위기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로라 아줌마가 나에게 다가왔다.
"미스 수진. 문제가 없다고 했잖아요. 모르는 건 나한테 물어봐요."
"예~스, 아 엠 소리, 아 엠 소리, But,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 목소리가 빨라서 못 알아들었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알둘라 닥터 칩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로라 아줌마와 둘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라 아줌마와 알둘라 닥터 칩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응급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더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짐을 다시 싸야지….
파미르 아저씨가 응급환자의 채혈을 담은 진공 튜브를 가져오자, 로라 아줌마도 검사에 힘을 보탰다.
먼저 혈액형 검사가 우선이다. 시약을 슬라이드글라스 위에 떨어뜨리고 환자의 혈액을 반응시키면 응고가 되는 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한 번 더 확인을 위해 유리 시험관에서 테스트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응급 상황에서 당장 수혈하기 위해 ABO형 혈액형만 찾는 것이고, 보다 안전한 수혈을 위해서는 병원에 보관하고 있는 혈액과 서로 응고 반응을 살펴야 한다. 환자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는 피검사는 화상병동 2층에 있는 임상검사센터로 보내 질 것이다.
오전에 느슨했던 외래검사센터 분위기가 급 반전하며 숨 쉴 틈 없이 돌아가자 나는 주눅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내가 검사를 도울 수도 있겠지만 괜히 나서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가 되면 어쩌나 싶었다.
압둘라 닥터 칩은 빠르게 업무를 지시했다. 나에겐 시선 줄 여유도 없이,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는 지도….
저녁 퇴근 시간 전, 압둘라 닥터 칩이 방으로 불렀다.
"미스 수진, 첫 날이라 힘들었죠. 많이 피곤해 보여요."
"예, 조금(a little)."
나는 압둘라 닥터 칩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말이 빠르면 분명히 해 둘 생각이었다. 못 알아듣겠다고. 천천히 말해 주던지, 아니면 영어를 못해도 일만 할 수 있는 업무로 바꿔달라고 할 참이었다. 머릿속에서 영어 문장을 만들어 몇 번을 연습해 놓았다.
"혹시, 영어가 잘 안 들리나요? 아니면 컨디션이 안 좋은가요?"
그는 쉬운 영어 단어를 써가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아이(I), 나는 조금 밖에 영어를 할 줄 몰라요. 음…, 바, 발음이 빨라서 듣는 게 어, 어려워요."
나는 파미르 아저씨처럼 중간에 허밍을 넣어가며 서툴지만 내 의사를 표현했다.
"나, 난 절대로 한국에 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 난 일은 할 수 있어요. 자, 자신있어요."
말을 매끄럽게 하지 못하고 더듬었다. 한마디로 버벅거렸다. 나는 점심시간 기숙사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눈 수경 간호사의 말을 떠올렸다.
'여기 일하러 왔지 영어하러 온 거 아니잖아예.'
그녀의 말에 용기가 났다. 돌아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남을 방법을 찾아보자고…. 압둘라 닥터 칩은 시계를 잠시 쳐다봤다. 턱을 괴고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퇴근 시간이니까, 내일 이야기해요. 이 간호부장하고 먼저 말해보고 나서 의논합시다. 난 지금 샬라 타임(해질녁 기도시간)이라서 병원 예배실에 가 봐야 해요."
나는 같이 일어서면서 '샬라 타임? 뭐지? 저녁 먹을 시간이라는 이야기야. 설마 유부남하고 둘이서?' 하며 뒷말은 못 알아듣고 엉뚱한 상상을 했다.
여자기숙사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에서 온 직원도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 기숙사 식당에는 같은 피부색끼리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했다. 한국 간호사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보였다. 테이블 반은 차지했다. 식사 메뉴는 피부색에 맞춰서 다국적 뷔페였다. 주방을 보니 요리사가 필리핀 여성이였다. 외래검사센터의 크리스티나가 뷔페 음식을 챙기면서 요리사와 필리핀어로 샬라샬라, 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접시를 들고 음식을 하나씩 담았다. 라이스, 빵, 쌀국수, 양고기 스프, 밀가루 전병 말이 튀김? 뭔 맛일까 궁금했다. 사우디 과자와 커피는 디저트 음식이라 밥을 먹어보고 나중에 챙기기로 했다.
크리스티나가 내가 앉은 자리로 왔다.
"하이, 미스 수진. 오늘 힘들었죠. 맛있게 드세요. 제 요리사 친구가 음식은 잘해요."
크리스티나는 저 친구에요, 하며 요리사를 보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나는 "하이"하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비스밀라(신의 축복으로 맛있게 드시길)" 하며 친구들 자리로 갔다.
'내가 음식이 넘어가겠니. 내일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판에….'
점심때도 심기가 불편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저녁까지 거를 수 없어 음식은 챙겼지만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음식 앞에서 주저주저했다. 군침은 도는데…. 일단 밀가루 전병말이 튀김을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었다. 튀긴 밀가루의 바싹한 맛은 온데간데없고, 버터향이 입 안을 감싸면서 시금치와 치즈가 아싹, 씹혔다. 이 독특한 맛은 뭐지? 하며 하나를 더 집어 살펴봤다. 잡채를 넣은 야채만두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나는 입 안에서 이 맛을 좀 더 탐닉했다
낙타 젖을 짜는 사막의 목동이 떠올랐다.
모래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젖 담는 통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다.
오늘 가족이 먹을 일용할 음식을 지키려고….
나는 밀가루전병으로 외피를 돌돌 감싼 튀김을 꼭꼭, 씹었다. 시금치와 치즈가 버터향에 뒤섞여 즙처럼 목구멍으로 흘러 들었다.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도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신 알라에게, 하느님에게, 부처님에게, 심지어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감사했다.
'비스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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