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이를테면 신문은 독자 관리 정책을 게을리 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유료독자 정책을 포기했다. 신문 스스로 만 오천 원이나 만 팔천 원의 구독료를 기꺼이 지불하고 신문을 봐야 할 이유를 독자한테서 빼앗았다. 신문 전체의 재원 중 광고료 대비 구독료의 비중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야 신문의 품질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 독자가 지불하는 구독료에 기대어야 국가 경제 환경이나 기업의 경영 여건에 덜 휘둘릴 수 있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는 기업과 더불어 신문에게 가장 큰 광고주이기도 한데, 이들의 홍보 정책에 오염되지 않고 시민들에게 양질의 뉴스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길은 유료 독자의 지갑을 열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시민들로 하여금 기꺼이 지불할 가치가 있는 뉴스를 공급한다는 평가를 얻어야 한다. 정부가 제공하는 홈페이지 보도 자료와 언론사의 이름으로 제공하는 뉴스 간에 질적 차이가 없다면 시민은 언론에 지갑을 열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언론은 기관의 보도 자료와 뉴스 기사의 품질 차별화를 하는 데 옹색했다. 언론을 언론답게 만드는 데스킹 기능도 오작동을 반복했다. 시민들은 지갑을 닫았다.
나아가 언론은 뉴스를 만들어 포털에 거저 공급하고 검색되게 하는 데 급급했을 뿐, 구독료를 지불하는 자사 독자의 효용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지불도 하지 않은 이용자와 값비싼 구독료를 지불하는 유료 독자들 간에 차별적 대우가 사라졌다. 시민들은 굳이 지갑을 열어 계속 유료 독자로 남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애써 지불하던 독자는 신문을 떠나 무료의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차츰 '읽는 독자'들이 포털에 노출되는 선정적, 자극적 뉴스 아이템을 '보는 이용자'로 질적 변화를 했다. 사회적으로 '읽는 힘'이 쇠퇴했다. 읽기는 생각을 되새김하는 과정을 거치는 데 신문은 독자들의, 독자가 되려는 시민들의 '읽기'를, 그리하여 시민들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삭제시켰다. 대신 기사를 클릭하는 숫자와 그 숫자에 붙어오는 광고비의 단맛에 취했다. 그뿐이랴, 언론은 덤으로 던져지는 실검 순위에 비틀거렸다. 같은 사안의 보도를 두고 대부분 언론의 온라인 기사의 제목과 지면 뉴스의 언어는 언죽번죽 너무 달랐다.
텍스트를 읽지 않는 사회에 성찰은 뿌리 내리지 못한다. 존엄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감수성은 얕아지고 특정 정보의 과소비에 기인한 혐오가 독버섯처럼 자란다. 혐오와 결합한 댓글은 왜바람마냥 아무데서나 솟아나 목표한 인물에 대해 치명상을 입힌다. '악플도 사랑의 표징이다'라는 따위의 막말이 공론장을 버젓이 활개치고 다닐 때 언론은 입을 다물었다가 말 화살을 맞고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 때 가서야 비로소 포털 책임론이나 악플러 각성론 같은 입말을 뻥긋한다. 자발없이 선정적인 기사를 생산하고 자극적인 정보를 재생산해서 포털에 유통시켜 온 행태를 언론 스스로 자제해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일부 포털의 연예 기사 댓글 폐지 정책의 효과는 언 발에 오줌 누기나 한 가지일 것이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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