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깐수, 우리 이름 정수일은 1996년 7월 22일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아랍인으로 단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신분이었던 그는 TV와 신문 등 언론에도 얼굴을 자주 비췄던 인물이었다. 연구활동도 활발해서 처용을 신라에 온 아랍인으로 풀이한 신라 서역 교류사 등 동서 문화교류사 연구에 명망이 높았다.
또한 언어에도 소질이 있어 한국어, 일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에 능통했고,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등 서양 언어를 포함한 12개국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온 국민을 놀라게 했다.
정수일은 누가 봐도 국적이 필리핀인 외국인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사실은 순수한 한국인이었다는 데 경악했고, 부인조차도 간첩으로 체포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정수일에 대한 놀라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감자가 엮어져 나오듯 그가 털어놓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 서울지검으로 이송되고 있는 정수일 모습/사진=중도일보 1996년 7월 23일자 |
정수일은 1934년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수재들만 들어가는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로 이집트와 모로코에서 유학 후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중국 외교관까지 지냈던 정수일, 그러나 그는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을 느끼고 1963년 북한으로 귀화했다. 북한은 이국적 외모에 총명하며 언어 구사까지 화려한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급기야 대남 공작원으로 보냈다.
북한에 ‘학생운동권 최근 동향’ ‘클린턴 방한’ 등을 남한의 최신 동향을 전하는 간첩활동을 하던 그는, 20년 전 ‘오늘(22일)’도 호텔에서 북한에 팩스를 발송하려다가 첩보를 입수한 안기부에 붙잡혔다.
국적이 필리핀이었던 정수일은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국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을 강조하며 추방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자 자신의 죽음보다도 동성교류문화사 연구 작업이 중단될 것에 가슴 아파했다.
당시 취조 과정 중 그 사실을 알게 된 공안 검사들이 그의 원고를 찾아다 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연구는 감옥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간첩이라기보다는 천상 학자였던 ‘간첩 깐수, 정수일’은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후 2003년 특별사면 및 복권돼 비로소 다시 학계로 돌아왔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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