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수 대전을지대병원 권역외상센터 외과 교수 |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환자의 아들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나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를 들기 전 마음속으로 대본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전에 병원 차원에서 철저한 감염 관리를 하며 모든 의료진이 어머니를 잘 보살피고 치료했지만, 피치 못하게 걸리게 됐습니다.' 변명일지 모르지만 보호자에게 나름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 준비했는데, 아들의 대답에 오히려 나는 말문이 막혔다.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정반대의 반응에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아들 말은 지난 두 달간 치료 과정에서 수없이 통화했던 대화에서 나오던 것과 같은 반응이었다.
"환자분께서 코로나에 걸리셨습니다." 하루 전 병동 간호사를 통해 들었지만, 담당 주치의인 나에게 한 번 더 안타까운 사실을 전해들은 아들의 대답은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했다. '입원하신 상태에서 걸리신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라, 주치의인 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19를 가볍게 생각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반응이 나올까 걱정하던 나에게 오히려 감사한 답변이었다.
아들의 어머니는 내가 치료했던 환자다. 80대 치매 노인으로, 시골 어디에선가 차에 몸통을 깔려 심한 장기 손상과 출혈, 여러 부위 골절로 100일도 훨씬 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한 문장으로 환자와 환자 가족과의 첫 만남부터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순간을 말할 수 없으나, 아마도 환자는 저승사자를 여러 번 만나고 온 것이 분명하다. 환자 몸에 들어간 5ℓ의 수혈 양이면 이미 이 조그만 노인 몸의 피는 다른 사람 피로 채워졌다. 잘 버티고 다시 건강을 찾아 회복한 이유가 아직 저쪽 세상 순서가 안 된 것이지, 아니면 이곳 외상센터에 처음부터 빨리 내원해 잘 치료받는 덕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들과 딸, 모든 가족의 한결같은 사랑과 정성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동시에 의료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당연히 있다.
수많은 고비와 수술 문턱도 넘었지만,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여러 가지 남아있는 시점에서 아주 고약한 불청객을 맞이했다. 마지막 큰 산을 마주한 것이다. 그때쯤이면 전 국민의 5분의 1이 걸린 시점이다. 아무리 대학병원에서 방역을 철저히 한다 해도 80대 노인 환자가 안 걸리는 것이 이상했을 시점이다. 효자 아들을 비롯해 가족들의 간절한 정성이 할머니에게 찾아온 고약한 바이러스를 물리쳐버린 것인지, 바이러스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에 환자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고 재활병원으로 전원을 갔다.
매번 낭떠러지 끝, 출혈과 고통으로 생명의 끝자락에 선 암울한 환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만남 자체는 나 스스로에게도 고통이다. 하지만 태연하게, 그리고 담당 의료진을 믿어주면서 말해주는 보호자의 한마디는 나에게 되레 힘이 된다. 당연한 결과지만 의료진을 믿어주며 함께하는 환자는 더 빠르고 잘 회복한다.
우연해 본 칼럼 '자리를 찾지 못한 슬픔'에서는 2022년 3월 '8172'라는 숫자를 말한다. 8172는 2022년 3월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이며, 그 숫자 안에 칼럼 저자 가족도 포함됐다고 말한다. 저자는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가족을 떠나보내며 통곡도 제대로 못 한 상태로 장례식장, 화장장에서의 일을 담담히 말해줬다. 생각해보니 내가 담당했던 할머니 환자도 어쩌면 저 8172라는 숫자에 포함될 뻔했다. 그러나 반대로 오히려 담담히 믿고 따라준 가족들 덕분인지 건강을 되찾고 불청객인 역병을 이겨내었다.
이렇게 호들갑, 난리 치던 3년여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마도 나는 운이 좋아 몇천만 명이 한 PCR 검사를 단 한 번도 안 했지만, 내 몸에도 항체가 생겼으리라 믿는다. 그 항체는 할머니 환자 그리고 아들 보호자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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