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혜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화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완성된 초상화를 보여준다. 온화한 미소와 연한 홍조를 띤 초상화를 바라보는 엘로이즈의 얼굴은 그림을 태울 듯 굳건하다. "당신이 바라보는 나는 이랬나요?" 엘로이즈의 물음에 마리안느는 그림에는 감정만이 전부가 아니며 규칙과 관습과 이념이 있다고 답한다. 엘로이즈는 말한다.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어요.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보여지는 존재일수록 시선은 침입이 된다. 관습, 규칙, 이념, 문화적 표준은 편파적으로 여성을 마름질한다. 동시에 재단된 형체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찬탄한다. 이 과정에서 암막으로 드리워진 본질적 감정은 드러내선 안 될 것이 되고 원치 않게 조명 아래 놓인 여성은 방어 기제를 덧바르며 뻣뻣해진다. 이런 상태에선 온 세상이 사랑을 말해도 사랑을 모르게 된다. 치수에 맞지 않는 나를 사랑하기란 몹시도 어려우며 눈높이가 다른 시선은 위화감만을 남긴 채 부서지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유도된 시선의 방향을 따르지 않을 때 여성은 보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자신을 왜곡하지 않고도 소속될 수 있는 안전망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존재에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으며 감정은 숨겨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습득하게 된다. 체화한 여성은 쓰기도 한다.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 흑심을 꺼낸 연필처럼. 그렇게 숨김을 해제한 문장은 기록이 된다. 기록은 같은 이들에게 가닿는 편지가 된다.
형체를 향한 소모를 그만둔 여성은 내면을 직시할 힘을 얻는다. 형체를 쫓으며 응어리졌던 감정은 해소되고 가장 본질적인 감정은 정체화된다. 여기에서 가장 본질적인 감정이란 욕망이다. 내재한 욕망은 현실에 발을 딛고 여성은 욕망의 방향을 따라 걷는다. 조명을 벗어난 자리에서 마주한, 햇빛이 스며든 얼굴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기록의 사전적 의미는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것. 나는 '보는 여성'이 자신의 시선을 성실히 기록하길 바란다. 관습을 벗겨낸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직시한 내면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사랑은 무슨 일을 하는지. 기록은 존재와도 순환한다. 적어 넣을수록 선명히 존재하게 되는 것. 이것은 남겨지는 것이 아닌 남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안다혜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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